제9화
월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겨우 마감 시간에 맞춰 원고를 보냈다. 전송 버튼을 누르긴 했지만 그것이 제대로 된 글이었는지는 솔직히 확신이 없었다. 어떤 글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고칠 힘이 없어 멈추는 것에 가깝다. 나는 와인을 한 잔 따랐다. 아침에 와인을 마시는 일은 그다지 권할 만한 습관은 아니지만, 나는 가끔 아침에 와인을 한잔씩 하곤 했다
창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공기는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나는 방금 끝낸 이야기를 잠시 떠올렸다.
void walker.
그녀를 생각하다, 문득 오래된 기억 하나가 천천히 떠올랐다.
그때 나는 열아홉이었다. 고3 여름이 막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교실은 늘 소란스러웠지만 도서관만큼은 비교적 조용한 공간이었다. 시험이 가까워질수록 학생들은 점점 말이 없어졌고,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드문드문 들렸다.
그 애는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조용한 아이였다. 책을 읽다가 가끔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아주 사소한 동작이었지만, 그 장면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나는 그전까지 누구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감정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애가 도서관에 들어오는 날이면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평소에는 한 번 훑어보면 정리되던 문장들이 이상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선은 자꾸 책 위에서 미끄러져 맞은편 자리로 가 닿았고, 나는 그 사실을 애써 모르는 척했다.
그 무렵까지 내 인생은 비교적 단순한 구조였다. 공부하면 성적이 나왔고 성적이 나오면 다음 단계로 올라갔다. 줄곧 전체 1등이었다. 그 질서는 꽤 오랫동안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애를 알게 된 이후로 집중력은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공부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게을러진 것도 아니었지만, 머릿속 어딘가가 늘 다른 생각으로 차 있었다.
그러다 어느 시험에서 나는 반 3등이 되었다.
그 숫자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애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별것 아닌 변화일 수도 있었지만, 내게는 조금 달랐다. 마치 아주 얇은 유리 표면에 보이지 않는 금이 하나 생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균열은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안쪽에서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모의고사 성적표를 보시고 내 뺨을 때렸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아주 짧은소리였다. 마른 손바닥이 얼굴에 닿는 소리였다.
나는 집을 나왔다.
중학교만 마치고 경기도 어딘가의 쌀통 공장에서 일하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갔다. 철판을 자르고 둥글게 말아 붙이면 가정집에서 보던 쌀통 모양이 만들어졌다. 기계는 하루 종일 같은 소리를 냈고 공장 안에는 금속 냄새가 희미하게 떠다녔다.
나는 그곳에 숨어 지냈다. 거의 이 년 가까운 시간이었다.
스물하나가 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리고 군대에 갔다. 어쩔 수 없이.
군대에서 처음으로 대학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어느 겨울밤 불침번을 서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전까지는 한 번도 진지하게 떠올려 본 적이 없던 생각이었다.
제대 후 나는 검정고시를 봤고, 수능을 봤다. 생각보다 점수가 잘 나왔고 나는 결국 법대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버지와는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법 공부를 하던 어느 겨울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갑자기 아버지 생각으로 옮겨 가려는 것을 애써 회피했다.
나는 잔에 남은 와인을 천천히 마셨다. 창문 밖으로 아침 빛이 조금 더 밝아지고 있었다. 어떤 기억들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상한 순간에 다시 돌아온다.
나는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법대 시절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나는
몇 번의 사랑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