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斜 線)의 위도

소설

by 김준완


그날 이후, 우리의 궤도는 눈에 띄게 겹쳐졌다.
독서실에서 우리는 비슷한 속도로 책장을 넘겼고,
가끔은 같은 문장 앞에서 함께 멈췄다.

어느 날은 ‘법인의 불법행위’를 두고 이야기가 길어졌다.

판례 하나로 시작했는데,
문장 하나를 놓고 해석이 어긋나는 순간부터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건물 뒤편은 골프장이었다.

밤에도 불이 켜져 있어
잔디 위가 희미하게 떠 있었고,
철제 펜스를 따라 난 길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 길을 천천히 걸었다.
말은 끊기지 않았다.

같은 조문을 몇 번이나 다시 꺼냈고,
걷다가 멈추고,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문장을 고쳐 말하는 사이에
서로의 말투가 조금씩 섞였다.

말이 끊기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독서실 바깥 의자에 앉았다.
몇 모금 마시면
아까 하던 말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다시 밖으로 나갔다.

골프장 위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고,
멀리서 물 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같은 문장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

밖이 밝아질 때까지
결론은 나지 않았다.

대신
서로의 말투와
문장을 끊는 방식 같은 것들이
희미하게 남았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같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조금 다른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
말이 없는 순간이 길어졌고,
그 침묵은 이전처럼 어색하지 않았다.

어느 오후였다.
독서실에서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 자고 싶어요. ]
나는 곧바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오타라고 보기에는 너무 또렷한 네 글자였고,
농담이라고 하기에는 그녀의 뒷모습이 지나치게 고요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굳이 문자를 보낸 이유를 한참 짚어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계속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종이 위를 긁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그날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문장은 그대로였지만
읽히는 방식이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자주 같은 시간에 묶였다.

스터디는 몇 명의 고시생들이 함께 모여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정해진 자리에 앉으면
각자 맡아온 부분을 돌아가며 설명했고,
모르는 부분은 그 자리에서 바로 짚었다.

누군가는 판례를 길게 읽었고,
누군가는 조문을 한 줄씩 끊어 물었다.
말이 길어지면
옆에서 정리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걸 다시 반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화는 한 방향으로 흘렀다가
중간에 꺾이곤 했다.

그녀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짧게 끊었다.

나는 그 말이
어디를 자르는지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시간이 넘기 시작하면
누군가는 시계를 봤고,
누군가는 자리를 정리했다.
그래도 끝내지 못한 날에는
몇 명이 더 남았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같이 밖으로 나왔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스터디가 끝났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누군가 먼저 나가자고 했고,
우리는 별다른 말 없이 따라나섰다.

택시를 나눠 타고
용인 쪽으로 내려갔다.

불 켜진 술집에서
몇 잔을 빠르게 비웠다.
말은 이어졌지만
서로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리는 컸고,
공기는 끈적했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같은 시간을 쓰고 있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그녀가 내 소매를 가볍게 잡았다.
나는 잠깐 멈췄고,
그녀는 이미 문 쪽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근처의 낡은 모텔.
간판 불빛이 반쯤 꺼져 있었고,
주변은 조용했다.

열쇠를 받아 들고
우리는 계단을 올라갔다.
방 안에 들어섰지만
곧바로 서로를 보지 못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밖에서 노래방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처음이에요.”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페어웨이의 밤공기 속에서 담배를 물고 있던 그녀의 옆얼굴이
겹치듯 떠올랐다가 금방 사라졌다.

그 사이로, 그녀의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잠깐 멈춰 있던 손이
다시 움직였다.
망설임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걸 오래 붙잡지는 않는 쪽이었다.

나는 그 움직임을 따라가느라
몇 번쯤 타이밍을 놓쳤다.
가까워졌다가
조금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식으로
호흡이 자꾸 어긋났다.

그때마다
그녀가 먼저 간격을 줄였다.

어느 순간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아주 짧게 웃었다가,
금방 표정을 지웠다.

그 사이에 있던 공기가
이상하게 또렷하게 남았다.

말은 거의 없었다.
숨이 조금 가빠졌고,
나는 몇 번이나
눈을 떴다가 감았다.
눈을 뜰 때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조금씩 다르게 느껴졌다.

창밖 가로등 빛이
커튼 틈 사이로 들어와
침대 위에 얇게 걸려 있었다.

우리는 그 빛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것처럼
조금씩 움직였다.

한참 뒤,
숨이 가라앉았을 때
그녀는 먼저 눈을 감았다.

나는 그대로 누워
천장을 한 번 보고,
다시 옆을 봤다.

방 안에는
아직도 움직임의 흔적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숨이
조금씩 일정해지는 걸 듣고 있다가,
나도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눈을 감았다.

밖에서는 여전히 노래가 이어지고 있었다.
조금 멀리서 물 뿌리는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그날 이후,
나는 같은 문장을 전처럼 읽지 못하게 되었다.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