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빛 속의 흰 빛

essay

by 김준완

세상은 언제나 완벽한 질서와 무결한 증명을 꿈꾼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수학적 공리계나, 마디마다 정확히 떨어지는 메트로놈의 박자처럼,

우리는 모든 것이 설명되고 통제되는 상태를 '완전함'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쿠르트 괴델은 그 견고한 성벽에 균열을 냈다. 아무리 완벽한 체계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결코 증명할 수 없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참'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그것은 체계의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논리라는 좁은 틀이 담아낼 수 없는 진리의 거대함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이 역설은 쇼팽의 야상곡에서 비로소 육신을 얻는다.

쇼팽의 선율은 악보라는 약속된 체계 위에 흐르지만, 그를 진정 쇼팽답게 만드는 것은 박자를 미세하게 어긋나게 만드는 '템포 루바토'와 미처 해결되지 못한 채 공중에 흩어지는 장식음들이다.

만약 쇼팽이 메트로놈의 질서에 완벽히 순응했다면, 그의 음악은 결점 없는 소음이었을지언정 영혼을 울리는 예술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검은건반이 만들어내는 정적 속에 흰 빛처럼 스며드는 그 불완전한 떨림들이 모여, 음악은 비로소 완전해진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지독한 불안' 또한 이와 같다.

불안은 평온이라는 질서가 깨진 불완전한 상태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내면의 공리계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진실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신호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그저 무거운 짐으로만 여긴다. 지독했던 불안이 어느새 무채색의 지루함으로 변질되는 순간은, 그 어둠 속에 숨겨진 '흰 빛'을 응시하기를 포기했을 때 찾아온다. 불안이 품은 생동하는 빛을 잊는 순간, 고통은 의미를 잃고 관성적인 우울이 된다.
​결국 완전함이란 결핍의 부재가 아니라, 결핍을 껴안은 전체성이다.

검은빛 속에 던져진 흰 빛은 체계를 교란하는 불청객이 아니라, 그 체계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목격자다.

우리가 불완전함을 긍정할 때, 그리고 그 지독한 불안 속에서 형형히 빛나는 흰 빛을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쇼팽의 선율처럼, 괴델의 문장처럼 완전해질 수 있다.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이토록 눈부시게 완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