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는 팔십일 ( 九九八十一): 진리는 서랍 속에 있다

essay

by 김준완


​〈 최고의 진리에 이르는 길은 무엇입니까? 구구는 팔십일 〉


​진리를 산에서 찾지 않고 나무에서 찾는 게 필요하다. 때론 서랍 속에서 진리를 찾아야 할 때도 있다. 15일 이전의 일은 묻지 않아야 하고, 15일 이후도 답이 아니라 의견이 있으면 말해 보는 것이 인생일 수 있다. 새로운 세계는 정의에 있지 않고 변화에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이다’가 아니고, 나는 ‘~되다’ 속에서 삶을 모색하는 것이 옳을 수 있다. 봄이 되어 백화가 피어나되 어느 누구를 위해 피어나지 않는 것을 봐도 그렇고, 인간은 인간일 뿐이어서 그렇기도 하다. 물의 존재를 입증하는 가능한 유일한 증거가 목마름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삶을 대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태어나기 이전과 죽음 이후를 알 수 없는 인간은 늘 삶을 모색할 수밖에 없고, 때로는 믿음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날엔 몽상이 필요하고, 추억을 찾고, 사랑을 갈구하기도 한다.


​Ⅰ. 서랍 속에 유기된 진실
​진리는 도달해야 할 정점이 아니다. 9 X 9 = 81이라는 자명함 속에, 혹은 분실한 로그인 ID를 찾기 위해 뒤적이는 서랍 속에 유기되어 있다. 나를 증명할 기호를 잃고 당혹해하는 그 비루한 찰나가, 산 정상의 비문보다 더 지독한 생의 민낯이다.


​Ⅱ. 15일, 유보된 생의 마디
​인간은 기어이 생의 허리에 마디를 긋는다. '15일'이라는 임의의 선을 세워 과거를 묻고 미래를 예단한다. 그러나 삶은 절단되지 않는다. 어제의 인과를 묻지 않고, 내일의 막막함을 확신이 아닌 '의견'으로 채워가는 일. 세계는 정의(Definition) 속에 머물지 않고, 오직 변화하는 결 위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낸다.


​Ⅲ. 텍스트(Text)에서 콘텍스트(Context)로
​"나는 ~이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존재는 텍스트로 박제된다. 우리는 명사의 감옥을 탈출해 콘텍스트라는 맥락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목마름으로 물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결핍의 서사는 빈곤하다. 갈증과 무관하게 물은 흐르고, 관객이 없어도 백화는 만발한다. 목적 없이 피어나는 것, 그것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실재다.


​Ⅳ. 몽상의 필연
​기원을 모르고 종말을 알 길 없는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모색'뿐이다. 안갯속을 걷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몽상을 품고, 추억을 뒤지며, 끝내 사랑을 갈구한다. 정교한 논리가 닿지 않는 생의 틈새를 이 가냘픈 도모들로 채우는 것. 그 투명한 발버둥이 바로 우리 생의 유일한 품격이다.


​에필로그: 다시, 서랍을 닫으며
​글을 마치고 나면 다시 서랍을 닫아야 할 시간입니다. 그 안에는 여전히 엉킨 전선들과 잊힌 영수증, 그리고 우리가 끝내 증명하지 못한 '나'의 조각들이 굴러다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압니다. 진리는 먼 곳의 휘황찬란한 빛이 아니라, 그 어수선한 서랍을 뒤적이는 우리의 투박한 손길 속에 있다는 것을. 내일은 또 다른 '15일'이 시작되겠지요. 누군가는 또다시 정의 내리려 애쓰겠지만, 우리는 그저 피어나는 꽃처럼, 흐르는 물처럼 "되어가는" 존재의 즐거움을 누렸으면 합니다.
​구구는 팔십일. 이토록 명쾌한 세상 뒤에 숨겨진 당신의 아름다운 몽상과 간절한 사랑을 응원합니다.


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