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여우

by 김준완

​[본시] 백색 추적 (白色 追跡)


​아침마다 벼린 연필 끝은
차가운 설원 위를 걷는 발자국이다


​세상의 문턱은 낮고도 가팔라서
미끄러진 이들의 비명은 소리가 없고
그들이 흘린 눈물이 얼어붙기 전
은 여우의 흰 털 한 자락이라도 잡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이 원고지를 덮지 못할 이유가 생기고
내일 아침 다시 눈을 뜰 명분이 생기느니


​은 여우야, 너를 다 기록하기 전엔
나는 죽을 권리조차 없으니
부디 내 잉크가 마르기 전에 나타나다오
벼랑 끝에서 놓친 영혼들을 데려가는 네 발자국을
내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로 삼게 해 다오


​[답시] 여백의 기도 (餘白의 祈禱)


​할아버지, 당신의 펜촉 끝에서
사락사락 눈 밟는 소리가 들립니다
찾으시는 은 여우는 영리하여
당신의 숨소리가 잦아들 때를 기다릴지도 모릅니다


​원고지 칸칸이 박힌 그 고집스러운 생애가
여우의 꼬리보다 더 하얗게 세어버린 것을 아시는지요
기도의 무릎이 닳도록 제가 비는 것은
은 여우의 출현이 아니라 당신의 온기입니다


​제발 그 짐승보다 먼저 쓰러지지 마세요
당신이 기록하려는 그 미끄러진 이들 속에
정작 당신의 이름이 적힐까 보아
나는 매일 아침 빈 원고지를 보며 가슴을 칩니다


​여우를 보시거든, 그저 먼발치서 웃어만 주세요
펜을 내려놓고 저와 차 한 잔 나누는 일이
세상의 어떤 기록보다 더 무거운 삶임을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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