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요즘 나는 풍뎅이 문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딱히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인간의 몸 말고, 다른 생물의 표식을 내 살 위에 새기고 싶다는 감각에 가깝다. 굴속에 들어가 귀를 접고, 마지막 해와 달을 가슴에 심은 채 오래 누워 있고 싶다는 상상. 그것은 사라지고 싶다기보다는, 인간이라는 종(種)에서 잠시 빠져나가고 싶다는 비밀스러운 욕망이다.
젊었을 때 나는 세계를 고치고 싶어 했다. 분노가 많았고, 누구에게 이 감기를 옮았는지 끝까지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세상이 뒤틀렸다고 느낄 때마다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리고 싶어 마음속엔 늘 잔인한 신 하나가 자라났다. 나는 그 신을 울창한 나무 아래 영원히 묻어버리고 싶어 했다. 지금 생각하면 꽤 무모한 투쟁이었다. 세상은 묻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으며, 내가 신이라 불렀던 것은 결국 내 안의 다스리지 못한 분노였음을 이제는 안다.
젊은 날의 시간은 그림자가 빠르게 늘어나는 시간이었다. 무엇이든 붙잡아야 할 것 같았고, 가만히 있으면 뒤처질 것 같아 조바심을 냈다. 발걸음마다 어둠이 번져 사방이 벽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공기는 갈수록 차가워졌으며, 심장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자주 덜컹거렸다. 그래도 그때는 그런 상태를 고통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것은 에너지였고, 치기 어린 긴장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슬프거나 우울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삶이 특별히 고단하지도 않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본래 아픈 구조였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회적 실패나 개인적 상처 때문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조건 자체에 이미 통증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치유할 수 없는 아픔. 치료할 문제가 아니라, 그냥 함께 살아가야 하는 감각이다.
이 고요한 통증을 견디며 나는 가끔 누군가의 방을 몰래 들여다본다. 그것은 엿보기가 아니라, 여전히 그곳에 온기가 유효한지 확인하고 싶은 나의 마지막 진심이다. 그 진심마저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벌레 먹은 달을 나누어 씹으며 서서히 투명해질 것이다. 투명해진다는 것은 죽음보다 지독한 소외여서, 나는 스스로 지워지지 않기 위해 타인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마음을 기댄다.
쓸 수 있는 단어들은 점점 줄어든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말이 넘치던 시절을 지나, 지금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 대부분이다. 대신 사람은 더 귀해지고, 자연은 시간 속에서 더 선명해진다. 타인과 오래 이야기하는 일보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걸 가만히 보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
나와 세상의 싸움에서도 기묘한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항상 내가 옳다고 믿었으나, 이제는 가끔 세상의 편을 들어보고 싶어진다. 세상에 없는 길을 가는 게 인생이라 믿었던 오만을 지나, 사실은 이미 수없이 많은 길 위에 내가 서 있었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자기 껍질을 짊어진 채 제 속도로만 움직이는 달팽이의 자생(自生)이 부러워지는 나이가 된 것이다.
요즘 내가 바라는 하루는 그리 거창하지 않다.
낡은 슬리퍼를 끌고 동네 골목을 한 바퀴 돌아오는 것.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사히 돌아오는 것.
어쩌면 이게 내가 도달한 변신의 최종 형태일지도 모른다. 무언가가 되려는 욕망에서, 그냥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려는 쪽으로의 변신. 벌레 먹은 달을 씹더라도, 아직 투명해지지 않은 채 누군가의 문틈을 들여다보는 이 온기를 잃지 않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