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의 번개

제4화

by 김준완

기상청의 예보에도 없던 기현상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 안의 성벽이 무너진 뒤에야 비로소 감각하게 된 외부의 실체였는지도 모른다.


마른하늘에 번개가 내리치고, 발등 위로는 계절을 잊은 눈송이들이 차갑게 쌓였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엔 정오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었으나, 그 한복판을 창백한 달빛이 느릿하게 가로지른다.
세상의 모든 질서가 한순간에 뒤엉킨 듯한 정오, 그 혼란스러운 빛 속에서 나는 너를 보았다.


낯설지 않았다.
잠이 든 매일 밤, 수만 개의 뉴런이 직조해 낸 무의식의 골목마다 너는 늘 유령처럼 서성였다.
꿈속의 우리는 수십 번 마주쳤고, 그때마다 나는 너를 잡으려다 벼랑 끝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뺨을 스치는 눈발은 지나치게 서늘했고, 귓가를 때리는 천둥소리는 고막을 진동시켰다.
눈을 감았다 떠도 너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를 마주하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도망치고 싶어 했던, 혹은 가닿고 싶어 했던 이 고독한 현실이야말로

내가 깨어나지 못한 가장 깊고도 아득한 꿈이었다는 것을.
너를 마주한 순간, 비로소 나의 긴 잠이 시작되었다.


방 안의 모든 빛이 꺼지고 나면 살아나는 것들이 있다.
모니터의 푸르스름한 잔광 속, 마감 기한을 넘긴 원고들이 먼지처럼 부유할 때
나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튼다.


정적을 뚫고 가장 먼저 고개를 드는 건 내 안의 작은 존재다.
치매에 걸린 개미 한 마리, 무거운 침묵 아래 길을 잃고 내 안을 헤맨다.
밤마다 달팽이관의 좁은 나선 계단을 벽을 긁으며 오르내리는 소리.

창밖을 보지 않고도 나는 예감한다. 아, 또 겨울이 오려나 보다.


나는 여전히 비관을 붙들고 있다.
하지만 슈베르트의 선율이 흐르는 순간만큼은 그 방어막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긴다.
스레드라는 무심한 숲에서 발견한 너의 문장들이 닿을 때마다,
고막에 맺힌 성에는 조금씩 투명해진다.


그 기대는 삶의 결이 날카롭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안고 가는 풍성한 부드러움이 너에게는 언제나 있었다.
얼굴을 온전히 본 적은 없지만,
문장 하나, 호흡 하나만으로도 나는 기댈 자리를 알아보았다.


안개가 걷히지 않은 길로 나설 준비를 하며, 나는 신발 끈을 묶는다.
개미는 여전히 울고 있고, 겨울은 이미 귓가에 도착했다.
오늘 나는 발걸음을 내딛는다.
누군가의 안부를 마음 한켠에 담고,
텍스트가 닿은 뿌리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너를 느끼며,
나는 오늘도 조금 더 걸어간다.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