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내 차는 도심의 붉은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 차 안에서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시보드 위 휴대폰 화면에는 계정이 사라지기 전 저장해 두었던 마지막 게시물의 캡처 화면이 떠 있었다. 사진 속 스마트워치 페이스에는 ‘평균 페이스 4분 35초’라고 적혀 있었다. 주인은 사라졌으나 데이터로 박제된 숫자는 여전히 생생했다.
서울 지도 앱을 열어 하천들을 검색했다. 캡처된 사진 속 물오리 두 마리와 낮은 다리의 위치를 대조했다. 양재천 하류 쪽에 다리 아이콘이 하나 찍혔다. 차가 하천 진입로로 들어갔다. 주차된 차들 사이로 러닝복 차림의 사람들이 보였다. 하천 표지판이 나타났다. ‘양재천 하류 300m’. 나는 방향등을 켰다.
양재천 하류에 도착했지만, 나는 바로 차 문을 열지 않았다. 잠시 후에야 문을 열자 날카로운 새벽 공기가 달려들었다. 안개는 예상보다 깊었다. 그때, 안개 너머에서 규칙적인 마찰음이 들려왔다. 착, 착, 착, 착. 내가 그녀에게 부여했던, 그 비정한 케이던스였다.
회색 후드 집업을 깊게 눌러쓴 여자가 안개를 뚫고 나타났다. 숨을 고르지 않은 채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찰나, 나는 본능적으로 반 발짝 물러섰다. 공기가 일렁였고 그녀의 온기가 스쳤지만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만나고 싶었으나, 만나지 않음으로써 지켜야만 하는 '나'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보(洑) 앞에서 멈춰 서서 주머니 속 종이 뭉치를 찢어 물 위로 던졌다. 마지막 조각이 떠내려갈 때까지 그녀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녀는 다시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차로 돌아와 운전석에 앉았다. 시동을 걸지 않은 채 핸들 위에 이마를 기댔다. 휴대폰 화면이 자동으로 켜지며 스레드의 캡처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토요일 오전의 수학 과외는 즐겁지만 러닝은 포기해야 하는 시간. 대신 일요일 아침, 하류의 안개를 독점한다.
나는 화면 상단의 날짜를 다시 보았다. 토요일이었다. 그녀가 남긴 명백한 오답. 차 안은 조용했다. 텍스트가 가리킨 방향과 실제의 그녀가 어긋나 있었다. 내가 보고 만진 것은 실체였을까, 아니면 그녀가 던져둔 또 다른 신기루였을까.
집에 도착했을 때, 습관처럼 스레드를 열었다. 어제까지 ‘알 수 없는 사용자’로 떴던 화면 위로, 기적처럼 혹은 저주처럼 그녀의 계정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새로고침된 타임라인에 차가운 피드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누군가 나를 쫓고 있는 기분이 든다. 안갯속에서 나를 보던 그 시선. 텍스트는 결코 영토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걸까.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창밖에서 스며든 새벽빛이 원고지 위의 빈 줄들을 비추었다. 그때, 나는 아이패드를 켰다. 화면 위로 마감 직전까지 써 내려갔던 에세이 원고가 차갑게 떠올랐다. 제목은 자못 거창했다.
<카프카의 굴: 실존적 고독의 요새>
‘카프카가 파 내려간 굴은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신성한 성채였다.
나는 그 문장들을 읽으며 무의식적으로 검지 손가락을 콧구멍 깊숙이 밀어 넣었다. 어제의 고상한 작가적 자아와 달리, 지금의 나는 그저 가려움을 참지 못해 구멍을 후비는 비루한 유기체였다. 손끝에 걸린 작은 딱지 하나가, 화면 속 정교한 은유들보다 훨씬 생생하고 정직한 ‘현존’의 증거처럼 다가왔다.
굴은 성채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 축축한 어둠 속으로 도망친 자의 구차한 은신처일지도 모른다. 나는 손끝에 걸린 딱지를 휴지통에 튕겨 넣었다. 딱지는 ‘실존적 고독’이라 적힌 문장들 위를 포복하듯 날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진짜 미궁은 텍스트 속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 내 손끝에, 그리고 이 지독한 일상의 악취 속에 있었다. 아이패드의 전원을 껐다.
허공을 겨울 바다처럼 앓는 사람들에게만
따뜻한 첫눈이 내리고,
나란히 걷던 어제의 발자국과
차마 부치지 못한 이름들은
정결한 흰 눈 아래 고요히 갇힌다.
나는 원고지 구석에 마지막 문장을 적어 넣었다. 나의 몹쓸 가을이 녹슨 폐물 되어 산등성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비로소 나의 가을이 저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