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 우리를 변신시킨다
사랑은 늘 그렇듯 간단하지 않습니다. 둘이 나란히 걷는 것만이 사랑인 줄 알았으나,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홀로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고독한 이별조차 어쩔 수 없는 사랑의 연장선이기도 하겠지요.
김수영 시인은 “시를 논할 때는 시를 쓰듯이 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시의 본질이 은유에 있다면, 그 은유는 또 다른 은유로만 표현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는 원시인들의 심성을 설명하며 ‘마음의 전능성(Omnipotence of thoughts)’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간절히 바라고 상상하는 것이 곧 현실이 된다고 믿는 순수한 힘입니다.
하지만 현대인의 상상력은 메마르기 그지없습니다. 견고한 사실만을 진리처럼 믿는 체제의 종교성 안에서 우리는 자폐적인 안온함에 머물곤 합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유미애와 황병승을 읽습니다.
“당신은 내 몸을 건너 백색 별로 간 고양이 / 나는 쇠락한 뒷골목의 장미나무” (유미애)
“차창에 기대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잠들었을 때, 나는 네가 그 상태로 숨이 끊어져 아름다움을 완성하길 바랐다.” (황병승)
이런 문장들은 나를 미치게 합니다. 백색 별로 가버린 고양이를 쫓는 시선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써만 완성되는 미학. 이는 세상이 말하는 ‘상식’과는 거리가 먼, 오직 마음의 전능성만이 가질 수 있는 서늘한 자유입니다. 카프카의 글을 읽듯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상관없습니다. 그 안에는 늘 내가 미처 가보지 못한 낯선 ‘변신’이 살아 움직이니까요.
문득 어린 시절, 내 새끼손가락에 정성스레 봉숭아물을 들여주시던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너는 남자니까 새끼손가락만 들여도 된다”며 내 손톱을 붉은 기적으로 물들이던 그 다정한 손길. 그것은 어쩌면 내 생에 다시없을 일회적인 사건이자, 관습적인 나를 죽이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한 카프카적 변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전지전능한 존재를 닮고 싶은 아침입니다.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도 우리는 자꾸만 스스로를 한계 속에 가두고 맙니다. 오늘 하루, 마음의 지평이 더 넓어질 수 있도록 스스로의 관성을 기꺼이 채찍질해 봅니다. 우리 안의 마음의 전능성이 다시 깨어나, 쇠락한 뒷골목에서도 장미나무로 피어날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