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
프롤로그: 당신이 내지 않아도 될 세금에 대하여
세상에서 가장 역설적인 세금이 있다. 소득이 낮을수록 세율이 높아지고,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가장 무겁게 부과되는 세금. 법전에는 단 한 줄도 명시돼 있지 않다. 국세청도 징수하지 않는다. 납부 영수증조차 발급되지 않는 은밀한 세금. 그러나 대한민국 사회 시스템 전체가 한 몸처럼 움직여 단 한 푼의 오차도 없이 징수해 가는 이 세금의 이름은 바로 ‘가난세(Poverty Tax)’다.
우리는 오랫동안 불평등을 이야기할 때 주로 소득 격차에 주목해 왔다. 누가 더 많이 버는가에 대한 논의는 무성했다. 하지만 어쩌면 더 근본적인 문제, ‘누가 같은 재화와 서비스를 위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분석은 부족했다. 가난하다는 것은 단순히 소득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 시스템이 강제한 ‘추가 비용’도 지불해야 한다. 이 추가 비용은 당신의 지갑뿐만 아니라, 당신의 유한한 시간, 심지어 당신의 건강과 미래까지 갉아먹을 수 있다.
<대한민국 가난세 보고서>는 한국 사회 시스템이 어떻게 가난한 이들의 시간과 돈을 체계적으로 착취하는지를 관련 데이터로 추적한다. 이런 가난은 개인의 나태나 잘못된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금융, 주거, 유통, 교통 시스템이 만들어낸 구조적 모순의 산물임을 증명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도 내고 있을지 모르는, 그러나 내지 않아도 될 이 부당한 세금의 실체를 밝혀낼 것이다.
1. 보이지 않는 고지서: 오늘 당신이 낸 가난세 계산서
가난세의 개념은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다. 구체적인 계산으로 시작해 보자. <대한민국 가난세 보고서>의 전반에 걸쳐 사용할 핵심적인 분석 틀, ‘시간의 금전화’와 ‘단위 가격의 역진성’을 적용해 평범한 저소득층 국민이 지불하는 가난세의 규모를 측정할 것이다.
경기도 외곽의 다세대 주택에 거주하며 서울 도심으로 출근하는 비정규직 근로자 A씨를 상상해보자. 그의 월 소득은 250만원이다. 반면 직장 근처 오피스텔에 거주하며 월 500만 원을 버는 정규직 근로자 B씨가 있다. 두 사람의 삶은 어떻게 다를까?
첫 번째 항목: 시간세(Time Tax)
A씨는 높은 주거비를 감당할 수 없어 외곽으로 밀려났다. 그의 출근길은 버스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야 하는 고된 여정이다. 왕복 3시간(180분)이 소요된다. B씨의 통근 시간은 왕복 40분에 불과하다. A씨는 B씨보다 매일 140분을 더 길 위에서 보낸다. 이 140분은 A씨가 공간 불평등으로 강제로 지불해야 하는 ‘시간세’다.
이 시간을 돈의 가치로 환산해 보자. 우리는 시간의 가치를 측정하기 위해 보수적인 기준인 최저임금(2025년 기준 시간당 10,030원, 분당 167원)을 적용할 것이다.
A씨의 연간 초과 통근 시간: 140분/일 × 22일/월 × 12개월 = 36,960분 (약 616시간)
A씨의 연간 시간세: 36,960분 × 167원/분 = 6,172,320원
A씨는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매년 617만 원이 넘는 비용을 길바닥에 뿌리고 있다. 그의 연봉(3,000만 원)의 20%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이 시간 동안 B씨는 자기 계발을 하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A씨에게는 그런 선택지가 주어지기 어렵다.
두 번째 항목: 금융 프리미엄
A씨는 얼마 전 급전이 필요해 카드론으로 1,000만 원을 빌렸다. 그의 신용점수로는 1금융권 이용이 어려웠고, 연 14.5%의 금리가 적용됐다. 반면 고신용자인 B씨는 같은 시기 은행에서 연 4.5%의 신용대출을 받았다. 동일한 금액을 빌렸지만 A씨는 B씨보다 연간 10% 포인트 높은 금리를 적용받는다.
A씨의 연간 금융 가난세 (만기일시·이자만 납부): 1,000만 원 × 10% = 1,000,000원
한국 금융 시스템이 A씨의 낮은 신용도에 부과하는 세금이다. 한국의 카드론 평균 금리는 14%대를 유지하며, 저신용자의 경우 법정 최고금리인 20%에 육박한다. 은행은 ‘위험 관리’를 때문에 신용도에 따라 대출 금리를 달리 책정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절박함을 담보로 한 구조적 비용 전가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세 번째 항목: 주거 역진성(Housing Regressivity)
A씨는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50만 원을 내고 5평(약 16.5㎡) 남짓한 원룸에 산다. B씨는 보증금 1억 원에 월세 100만 원을 내고 15평(약 49.5㎡) 오피스텔에 거주한다. 언뜻 보면 A씨의 주거비가 저렴해 보인다. 하지만 ‘면적당 임대료’를 계산하면 다른 사실이 드러난다. 월세 전환율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 계산만 해도, A씨의 평당(3.3㎡) 월세는 10만원이다. 반, B씨의 평당 월세는 약 6만 7000원이다.
B씨와 비교할 때 A씨의 연간 주거 가난세(평당 임대료 차액):
(10만원 - 6만 7000원)×5평×12개월 = 1,980,000원
A씨는 B씨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 살면서도, 단위 면적당으로는 1.5배나 비싼 임대료를 지불하고 있다. 만약 A씨가 고시원에 거주한다면 이 격차는 더 벌어진다. 고시원의 평당 임대료는 아파트보다 2배에서 최대 5배까지 비싸다. 이것이 주거 시장의 냉혹한 역진성이다.
네 번째 항목: 유통 단가 프리미엄(Distribution Premium)
A씨는 좁은 집에 식료품을 쌓아둘 공간이 부족하다. 당장 현금이 부족해 대용량 제품을 구매하기 어렵다. 그는 주로 편의점에서 소포장된 제품을 구매한다. 한국소비자원의 ‘참가격’ 데이터 분석 결과는 소포장 제품의 단위 가격(g당, ml당)이 대용량 제품보다 평균 20~30% 비싸다는 것을 보여준다. A씨가 생필품 구매에 월 30만 원을 지출하고, 그중 20%가 추가 비용이라고 가정해보자.
A씨의 연간 유통 가난세: 30만 원/월×20%×12개월 = 720,000원
네 항목의 A씨 가난세 총액은 연간 9,872,320원이다.
A씨는 B씨와 동일한 수준의 재화와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연간 약 987만 원의 가난세를 추가로 납부하고 있다. 그의 연 소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 막대한 세금은 A씨가 저축을 하고, 자산을 형성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것을 가로막는다.
이 계산서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시간세를 계산할 때 최저임금을 적용했다. 건강 악화에 따른 의료비 증가(몸의 가난세)는 포함하지도 않았다. 한국 사회 시스템이 징수하는 가난세의 실제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