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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남캐 Jun 03. 2022

푸른 은행잎에 대해서 사유해 보았습니다

기다림의 절정

 



 출근길이었다. 오늘따라 도보에 줄지어 선 가로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5월의 햇살과 어우러져 눈부시게 푸른 모습이었다. 너희 참 예쁘다. 마음으로 속삭였다. 늘 같은 자리에서 여러 차례 만나던 나무였다. 몇 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름이 궁금해졌다. 그냥 갑자기 눈에 띄었다는 이유, 날이 맑아서 유난히 기분이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잎의 모양이 무척 익숙했다. 다름 아닌 은행나무였다. 단지 색이 푸르다는 까닭으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가을의 샛노란 빛깔에 익숙해져 있던 탓이었다.

 




 

 요즘 나는 거의 매일같이 죄책감과의 싸움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심보가 고약한 녀석이다. 하루의 틈새를 비집고 무시로 찾아와 나의 내면을 자주 할퀸다. 죄책감의 근거는 대부분 과거에 있었다. 지난 10년간 얼마나 시간을 낭비해 왔는지, 20대를 충실히 살았더라면 지금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이제 앞으로의 10년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책임하게 떠올라버리는 생각들이다.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다가도, 마트에서 클레임 전화에 시달리다 잠시 쉬는 시간에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심지어 설거지를 해치우거나 빨래를 널다가도 기습적으로 공격당한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감정과 생각들이다. 스물아홉, 나는 이제 막 출발지점에 섰을 뿐이었다. 아무런 대외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고, 당연히 고민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시점이다. 매 하루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내는 것 외에는 아무런 도리가 없다. 그저 매일 같이 쓴다. 때로는 써지지 않더라도 견딘다. 엉덩이를 우직하게 붙이고 앉아서 글감을 고민하거나, 아니면 바깥에 나가 조금 걷기도 한다. 또, 아침저녁으로 읽는다. 나의 읽는 방식이 훌륭한 사람들에 비해 진취적이지 못하더라도, 읽어야 하는 시간이 찾아오면 반드시 읽는다. 내 마음을 관통하는 문장과 만나면 충분히 감동한다. 그리고 여유가 있다면 필사한다.





 은행나무는, 이 고요한 식물은 사계절 내내 변함없이 은행나무였다. 잎이 노랗게 물들고 열매가 영글기 이전부터, 봄과 여름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었을 터였다. 다가올 가을을 위해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뿌리에서부터 물과 양분들을 끌어올려 내면에 간직해둔 노란빛들을 부지런히도 가꿔왔을 것이었다. 은행나무의 잎이 푸르던 시간들은 어떻게 보면 아름다움의 절정은 아닐지 몰라도 기다림의 절정이긴 하였을 것이다. 기다림은 수동이 아니라 능동이다. 그리움에 잠식되어 가만히 바라고만 있는 것은 차라리 포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다린다는 것은, 기다림의 대상을 준비하며 부지런히 그 그리움을 살아내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사랑하는 누군가이든, 내가 꿈꾸는 미래의 내 모습이든 마찬가지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싶다.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변함없이 읽고 쓰고 싶다.


 




 이 글감에 대해 사유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작은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지금 푸르다. 기다림의 절정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나의 모습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내가 기억하겠다. 나는 나의 푸르던 날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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