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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남캐 Jun 07. 2022

뛰기 싫은데도 눈 딱 감고 뛰어 보았습니다

매일 밤 이를 닦는 것처럼

  

침대 위의 보안관, 우디


 휴일이었다. 알람에 눈을 뜨자마자 나는 한숨을 구슬프게 내쉬었다. 게으름이 온몸을 질퍽하게 휘감고 있는 느낌이었다. 최근 기계적으로 몸을 일으켰던 것과는 다르게, 무척 오랜만에 느껴보는 권태감이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열어 일일 루틴 목록을 확인했다. 아침 10분 독서하기, 5분간 명상하기, 글쓰기 15분 이상 하기, 어머니께 전화드리기 등 매 하루 지켜내야 할 습관들이 적혀있었다. 그중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차트가 하나가 눈에 띄었다. '기상 후 30분 러닝 실천하기'였다. 나는 신음하며 잠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오늘따라 나갈 자신이 없었다. 전날 아침에도 뛰었었고, 심지어 출근시간 전이었다. 온몸에 어제의 저항들이 무겁게 남아있었다. 10분만 더, 30분만 더, 그것도 모자라 한두 시간쯤 냅다 자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침대 위에서 아무 의미 없이 뒹굴고 싶었다. 그렇게 뒹굴다가, 자연스럽게 정신이 말똥말똥 해질 때쯤 몸을 일으키고 싶었다. 오늘 저녁에 뛸까. 아니면 내일로 옮길까. 오만가지 꼼수들이 떠올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이 최선일 것 같았다. 휴일 이틀 동안 하고 싶은 일들이 꽤나 많았다. 모두 만족스럽게 소화해 내려면 지금 뛰어야만 했다. 나는 의연히 몸을 일으켜 이불을 정리하고, 환기했다. 욕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씻고 러닝복을 입었다. 텀블러에 파워에이드를 절반 정도 채웠다. 목을 간간이 적실 만큼이면 충분했다. 너무 많이 담으면 무겁고 거추장스러웠다.






 정오의 태양광을 가르며 나는 달렸다. 소양강의 드넓은 흐름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햇빛들이 물에 뜰 수 있는 사금 가루처럼 수면 위에 찬연히 흩뿌려져 있었다. 숨이 차오르는데도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누가 농담을 건넨 것도 아니었고, 우스꽝스러운 꼴을 목격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달리고 있는 것뿐이면서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선물 같은 풍경이 좋았고, 아직은 무덥지 않은 5월의 선선함이 좋았다. 바람을 가르는 감각이 좋았고, 종아리의 근육들이 자극되는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내가 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어제의 내 결심과 오늘의 내 실행이 건강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기상 직후 침대에서와는 180도 다른 기분이었다.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의 질이 무척 좋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샘솟았다.



매일 밤 이를 닦는 것처럼



 몸이 도저히 따라주지 않을 것만 같을 때가 있다. '자신에게 너무 과도한 과제를 부여한 것은 아닐까, 이번 정도는 쉬어줘도 되지 않을까' 따위의 유약한 감정들이 무시로 나를 잠식하려 든다. 어쩌면 그런 감정들은 다만 스쳐갈 뿐인 순간의 충동에 지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조금 무겁다는 이유로, 잠이 아직 덜 깼다는 이유로, 꿈자리가 뒤숭숭하다는 이유로, 날씨가 기대와는 다르게 흐리다는 이유로 그런 감정들은 의미 없이 생겨나서 의미 없이 실행을 포기하게 만든다. 더없이 소중해야 할 하루의 끝에 진득한 후회들을 남기게 만든다.

 물론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것은 좋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성향과 현재 수준을 파악하고, 그에 알맞은 계획과 목표를 영리하게 설정할 줄 알아야 한다. 다만 감정의 지배를 받는 일은 결이 다르다. 협상과 굴종은 동의어일 수 없다. 문득 출근하기 싫어졌다고 해서 무단결근하지 않는 것처럼, 친구와 사소한 감정 다툼을 했다고 해서 절교하지 않는 것처럼 충분히 참아낼 수 있는 일들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들이 우리의 일상 속에는 산재해있다. 감정을 감정인 채로 그냥 내버려 두고, 마치 매일 밤 양치하듯 나와의 약속을 이행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무척 건강하다. 한차례라도 닦지 않으면 치아가 모조리 썩어버릴 것처럼 매일 무언가를 묵묵히 '실천'할 때 반드시 얻게 되는 선물이 있다. 그것은 펼쳐지는 온전한 하루다. 다른 누구에게서도 대신 받을 수 없다. 오직 자신이 자신에게만 줄 수 있다.






 이런 글감이 소재인 경우 '나와의 싸움에서 이겼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엔 조금 달랐다. 오히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를 위해, 버겁더라도 믿고 따라주었다'라는 감각에 더 가까웠다. 이 문장을 우연히 적고 나서 무척 기분이 고양되는 것을 느꼈다. '적이 아닌 동료로서의 나'라니! 내가 나의 아군이 되어주는 것만큼 든든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아군을 잘 어르고 달래서, 어떻게든 오래 곁에 두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생의 끝까지 나와 함께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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