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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로나 Aug 17. 2021

아이가 사 온 우유

"나도 눌러보고 싶은데.."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누르는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눌러보고 싶어 하던 채민이었다.

키가 닿지 않아 맨 아래에 있는 ## 2 개를 누르게 했더니 신나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누를 거야"

어느새 키가 자라고, 숫자도 익숙하니 공동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건 아이의 담당이 되었다.

언니의 그 모습을 부러워하는 다민이는 엘리베이터 올라가는 버튼 누르기 전담이 되었고.


9층에서 내린 우리는 한 단계가 더 남아 있다.

현관 비밀번호에도 관심이 생긴 채민은 숫자가 뭔지 매일 질문했고, 한 번에 통과되는 날보다 여러 번 에러 소리가 들린 후에야 문을 열 수 있는 날들이 더 많았다.


이젠 능숙하게 번호를 누르게 된 아이가 어느 날 말했다.


"이슬이의 첫 심부름(동화책)처럼 나도 이제 우유 사 올 수 있어"

"혼자?"

"응. 이제 번호도 다 누를 줄 알고, 길도 알고 있어"

"그래. 그럼 집 앞 편의점은 가까우니까. 길도 건너지 않아도 되고, 거기서 우유 사 올래?"

"응. 다민아! 언니랑 같이 가자"

(동생도 데려간다고??)

"손 꼭 붙잡고 다녀와야 해. 엄마 여기서 기다릴게"


멀어지는 두 아이를 보며 어느 쪽으로 몰래 따라갈까 고민했다.

편의점 유리문 사이로 비친 두 아이.

다행히 우유 앞에 서 있다.

'왜 자꾸 들었다 놨다 하는 거지? 그냥 그거라고. 서울 우유 인지, 매일 우유 인지 콕 짚어줄 걸 그랬나'


계산대에서 사장님이 나오셔서 아이들 쪽으로 가신다.

난 얼른 편의점 앞 버스 정류장 쪽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혹시 들킬까 싶어서 고개만 빼꼼 내밀기를 반복했다.

아이들이 나왔다. 조심스럽게 뒤를 따라갔다.

벌써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다.

엘리베이터 앞에 왔더니 9층에 멈춰 있다.

'휴... 잘 올라갔구나. 흑흑'


현관문을 열자마자 아이들은 우유를 사 왔다고 한껏 들떠있다.

이미 아빠에게 자랑을 하고 있었고, 엄마를 보자마자 더 신나 보인다.

"엄마! 내가 서울우유를 샀어요. 영수증이랑 300원도 받았어요"

"오~ 대단한데? 다민이도 언니 잘 따라다녔어?"

"내가 우유가 너무 무거워서, 다민이에게 영수증을 들어달라고 했어. 그랬더니 괜찮았어"

(ㅋㅋㅋㅋㅋㅋ)


정말 잘했다고, 최고라고. 멋지다고. 아름답게 마무리하면 되는데.

"근데 왜 아저씨가 300원을 주셨지? 우유가 얼마래? 엄마가 돈 얼마 줬었지?"라며 폭풍 질문을 쏟아내는 나였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이 엄마야.

2700원짜리 우유를 3000원에 샀으니까, 거스름돈 300원을 받은 건 조금 나중에 말해도 되지 않냐고. ㅋㅋㅋ


아차 싶었지만 그래도 내 할 말은 다 하고, 한 번 더 폭풍 칭찬을 날려줬다.


"엄마! 이제 우유가 필요하면 나랑 다민이가 사 올게!"


응. 알았어.


근데... 언제 이렇게 컸어?????





<<이슬이의 첫 심부름 -쓰쓰이 요리코>>


아이는 이 책을 보고 혼자 우유를 사러 다녀올 날을 기다렸다.

동생을 보느라 바쁜 엄마가 5살인 이슬이에게 우유를 사다 달라고 부탁한 것.

혼자 가게까지 가는 길의 낯섦과 긴장감이 잘 표현되어 있고,

엄마가 준 동전을 손에 꼭 쥐고 가는 모습,

가게에 가서도 쉽게 주인아주머니를 부르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

엄마와 동생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

모든 장면이 생생하다.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이슬이의 이야기를 자주 주고받았던 기억도 생생하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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