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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ky Mar 30. 2020

#04-1 20년 지기의 웃픈 뒷담화

소시지를 씹자

새로 선보인 잡지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무렵, 새 마케터가 입사했다. 매체 홍보에만 집중할 마케터가 필요하다는 우리의 요구(이미 업무 과부하인 에디터에게 홍보일까지 강요하지 말라는 무언의 시위)에 대표가 고민 끝에 마케터를 들였다. 그런데, 그 직원은 꺼림칙했다. 외모의 문제가 아니라 생글생글 웃으면서 어깨를 자주 흔드는 행동이나 말끝을 제대로 맺지 않는 말투만으로 괜한 경계심이 생겼다. 이거, 잘못했다간 호구 잡히겠는 걸.



아니나 다를까. 그 마케터는 대표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직원들 머리 위에 오르려 했다. 이 작은 회사에서 온갖 정치질을 해대는 꼴이라니. 은근슬쩍 직원들에게 도움을 핑계로 자신의 일을 떠넘겼다. 가장  피 본 직원은  K였는데, 참다못해 나는 밀크티를 사주겠다고 K를 밖으로 불러냈다. 이어, 물러 터져서 그걸 당하고 있냐며 잔소리 대잔치.  그런데도 K는 그 마케터의 일을 도와줬지, 아니 일을 해줬지. 이 바보 같이 착한 사람. (가슴에 손을 얹고) K 외에도 내 동료들은 무척 착하고 선의로만 가득한 사람들이라서 가끔은 답답할 때도 있다. 대표도 허수아비는 아닌지라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나중에 회식 자리에서 그때 왜 당하게 내버려뒀냐고 물어보니 살다보면 이런저런 케이스를 많이 보게 되는데 그런 경험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개소리를 해대서 정 떨어졌지.) 눈앞에 닥친 일을 그 마케터에게 시켰더니 진전이 없는지 그 일을 고스란히 에디터에게 넘겼다. 그때가 1교 일주일 전이라 정신없는 시기에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지만, 수습이 우선이었기에 우리는 묵묵히 밀린 일을 해결했다.



결국 나는 원고를 끝내지 못했다. 인쇄 일정을 하루만 늦출 수 없겠냐고 요청하자마자 대표는 크게 화냈다. 물론 인쇄 일정을 지키지 않는 건 프로답지 않은 행동이다. 하지만 이건 무척이나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에디터들도, 하물며 교정교열을 보는 P도 원고를 끝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스케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면서 남의 일을 에디터들에게 떠넘긴 대표가 화낼 일은 아니었다. 새 잡지 만들 때가 더 시간이 촉박했는데 그때도 일정 잘 맞추더니 안 그러던 사람이 왜 그러냐, 프로페셔널하지 못하다나 뭐라나.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참았더니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가 그 일을 해냈다고 언제나 그만큼의 일을 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동료 에디터들이 마음 써줬지만 독이 바짝 올라 이미 눈에 뵈는 게 없던 나는 족히 이틀이 걸리는 원고를 6시간 만에 끝냈다.



그날 원고를 다 쓰고 P와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마셨다. 말 한마디 꺼낼 때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겨우 참으며 술잔을 들었다. (분노조절을 못하는 편이라 한 번 눈이 돌아가면 순간 기억상실이라도 오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때 P가 내 분노 단계를 파악해 화내기 직전까지만 밀고 당기는데, 얄미워 죽겠다.)



P와 K는 물론이고 M에게도 욕을 한 바가지 했다. (웹퍼블리셔인 M 역시 내 추천으로 입사한 20년 지기 친구다. M은 티 없이 밝은 아이다. 초반에는 둘이 친구인 게 안 믿긴다는 소릴 자주 들었는데 시간이 지난수록 끼리끼리 논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사무실에서 실시간으로 내 분노를 지켜본 M은 걱정됐는지 남자 친구와 놀기도 바쁜 주말 저녁에 나를 불러냈다. 그날 M에게 그 마케터 욕을 한바탕 했다. 한동안 잘 들어주던 M이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 그렇게 나쁜 사람은 없어. 너도 많이 화가 나겠지만 그 사람도 고의는 아니었을 거야. 같이 일해야 하는데, 네가 좀 참아.”



내가 욕한다고 M도 그 사람이 싫다고 욕하는 건 싫었다. 서운하긴 했지만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괜히 동조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동조하지 않을 사람들만 골라서 욕을 한 것도 있다. 동료들 중 어리광쟁이는 나밖에 없다.



“몰라! 누가 착한 년 아니랄까 봐. 나만 죽일 년이지, 나만.”



일주일 뒤, 무사히 인쇄 감리까지 마치고 주말 출근 대신 받은 휴일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M이 영화나 보자고 연락이 왔다. 시간 맞춰 영화관 내 카페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면서 M을 기다렸다. 원래 영화 볼 때 간식을 안 먹는 편이지만, 어쩐 일인지 출출해서 팝콘이나 사 먹을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M이 보였다. 걸음걸이가 심상치 않았다. 온 몸무게를 다 실어서 타박타박 걸어오는데, 돈가스 사주겠다는 엄마의 말에 속아 치과에 끌려갔다 온 일곱 살짜리 애처럼 얼굴이 심술이 가득했다.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시뻘게진 얼굴로 테이블에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더니 M이 대뜸 말했다.



“미안해. 정말.”


“뭔솔?”


“네 말이 맞았어. 내가 섣불렀어.”



전혀 영문을 모르겠는 건 아니었다. 에디터들과 디자이너들이 없는 사무실에 대표가 출근했을 리 만무하고, 회계 담당 팀장님도 쉬는 날이었으니 오늘 출근한 사람은 M과 그 마케터 둘 뿐이었다. M의 말에 따르면 내게 영화 보자고 연락을 한 후 다시 일을 하고 있는데 그 마케터가 자신에게 잠시 회의를 하자고 하더니 대표라도 된 것 마냥 이리저리 일을 시키더랬다. 자신은 M을 도와주는 거지 이건 자신의 일이 아니라면서. 퇴근하기 한 시간 전에 퇴근하고, 점심 먹으러 나가서 2시간이 지나서 들어오고, 거기다가 자신에게 회의를 하재 놓고 회의할 내용도 없었다고.


“왜, 세상에 나쁜 사람 없다며?”


“진짜, 정말, 미안. 콘텐츠를 시각적으로 만드는 건 내 일이지만, 콘텐츠를 짜고 글을 마케터가 줘야하잖아. 대표도 그렇게 말했다고. 아니 다 필요 없고. 백 번 양보해서 도와주는 거라고 치자. 그러면 적어도 자기가 어떤 일을 도와주는 건지 숙지는 해야지. 그리고 같은 직원인데 왜 대표처럼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종이를 툭툭 치고. 숙지를 못해서 보여주려는데 핸드폰 내려놓으라고 명령이나 하고!”



설움이 폭발했는지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시간을 보아하니 아직 영화 시작 30분 전이었다. 그렇다면...


“술이나 마시러 갈래?”


"그래."


M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동시에 핸드폰을 꺼내 영화를 취소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친구야. 뭐 먹고 싶어?!”


"소시지!"





독립출판물  『정말 술 마시게 하는 퇴사』 연재


원고가 다 마무리되면 편집 후 독립출판물을 제작할 예정입니다.

평일 내내 하루에 하나씩 업로드할 예정이지만,

제가 백수라 마음 내키면 놀아버릴지도 몰라요~!

(혹은.... 구직 준비로 인한 갑작스러운 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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