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츠나베와 사케 많이
우리는 잔을 부딪혔다. 내가 한 잔, P가 한 잔 하고도 반.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속도에 맞춰 모스케와 잔파블랙을 마셔댔다. 끓는 모츠나베의 열기 탓인지 한껏 달아오른 체온 탓인지 한껏 목청을 높였다. 나는 세 번째 시킨 모스케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쳤다. 드라마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멋있게 하고 싶었는데 새가슴인지라 생각보다 더 큰소리가 나서 '세상 민폐'를 만회하고자 멋쩍게 주변을 둘러보고 부랴부랴 테이블에 흘린 술을 냅킨으로 닦아냈다. 과연 폼이란 민폐를 동반하는가.
“오빠는 그만두고 뭐할 거야?”
아까운 술. 괜스레 젖은 냅킨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척척하다. 많이도 흘렸네. 평소 같으면 “잘하는 짓이다”라고 핀잔을 뒀을 P가 덤덤하게 답했다. P는 퇴사 후 본가에 내려갈 예정이라고 했다. P의 본가는 충청북도 청주다. 한 달에 한 번, 마감하고 나면 집에 내려갔던 P는 최근 몇 달 정도 본가에 내려가지 못했다. 쉬는 날도 예전보다 짧아졌고, 마감 후에는 인천 집에서 하루 쉬고 나머지 하루는 나와 여가를 즐기는 것으로 때워서인지 체력이 남아나지 않는다고. 그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만 했으니 당분간은 본가에 내려가 집밥 먹으며 다이어트도 하고,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면 그때 다시 취업 준비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길어도 쉬는 기간은 한 달 정도 본다고.
P는 에디터 중 가장 나이가 많다. 동갑내기 에디터와 디자이너의 퇴사가 P에게 꽤 스트레스였다. 이 망할 놈의 책임감 때문에. 마감 때만 되면 2주 동안 쉬는 날 없이 출근하고는 했다. 기계처럼 뽑아내는 원고를 받아 교정인지 퇴고인지 모를 교정교열을 묵묵하게. 그럴 때마다 괜히 내가 더 울컥해서 화를 내고는 했는데, 그것도 한없이 예민해지는 P의 상태를 살피며 눈치껏이었다. 너도 똑같다며 혼날까 봐. 나름대로 썼지만 자료를 더 찾을 시간이, 한 권이라도 책을 더 읽을 시간이, 한 번이라도 더 퇴고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잡지가 나왔을 때 부끄럽지 않을 만큼 말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매번 최선을 다해 원고를 쓰고, 퇴고하고, 교정을 봤다. 아쉬운 적은 있어도 부끄러운 적은 없다.)
“생각해보면 네 덕에 여기까지 온 것 같아. K도 마찬가지고.”
내 덕이라니. P는 똑똑한 사람이라 내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대체로 내 눈치를 보느라고 기 한번 제대로 펴고 일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무슨 내 덕이란 말을...
P는 내 추천으로 지금의 회사로 이직했다. 교육원을 수료하고 다른 동기와 사진계 잡지에 동시 입사했는데, 종종 만나면 앓는 소리를 해댔다. 월급은 안 들어오고 같이 일하는 동기는 일도 제대로 안 하고 자신에게 미루기만 한다고, 같은 돈 받고 일하는데 왜 좋은 소리도 못 듣고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당시 연인이었던 P를 위로하면서 시시때때로 기회를 엿봤다. 이 '물렁이'는 기회가 생기지 않는 한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할게 뻔했다. 그러니 내가 움직이는 수밖에. 마음 단단히 먹고 있는 시기에 우리 회사에 자리가 났고, 나는 대표에게 당당하게 P를 추천했다.
“나는 오히려 미안한 걸. 다들 내가 추천해서 들어온 건데, 월급도 못 받고, 일은 일대로 힘들고.”
한 모금 정도 남은 모스케를 마저 마시고 P를 보며 검지로 잔을 톡톡 건드렸다. (한 잔 더 시켜달라는 제스처인데, 어느 정도 술을 마셨다 싶으면 더 마셔도 괜찮은지 묻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P는 내 안색을 시키더니 결심이라도 한 듯 종업원을 찾았다. 시간이 꽤 늦어서인지 벅적거리던 가게가 조용했다. 가게 사장님이 술과 함께 꼬치 다섯 개를 올린 접시를 들고 우리 앞에 섰다.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시판 전인데, 한번 드셔 보시고 어떤지 말씀해주세요.”
사장님이 준 꼬치를 들고 우리는 중세 기사라도 된 것처럼 꼬치를 들었다. 비장하게 한 입 베어 물고 흥이 올랐다. 크로와상처럼 바삭한 겉과 달리 쫄깃쫄깃한 속이 일품이었다. 어릴 때는 이런 음식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저 동네 호프집에서 가장 저렴한 안주를 시켜 술을 마시거나 흔하디 흔한 연어 사시미를 먹으며 연어 맛이 뭔지도 모르고 맛있다며 먹어댔지. 하얀 지방층이 많은 회일수록 생고추냉이를 얹어 간장에 살짝 찍어 먹으면 매운맛은커녕 땅콩처럼 고소한 맛이 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지.
“이 맛에 돈 버는 거지!! 그러고 보니 술을 서비스로 준 가게는 여기가 두 번째였어."
그러네. 우리가 처음으로 술을 서비스로 받은 건 망원동에 있던,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진 슌지츠였지.
슌지츠는 사물실이 망원동에 있을 시절 자주 방문했던 술집이었다. 테이블 6개가 전부인 아주 작은 이자카야였는데, 푸드트럭을 해서 돈 번 사장님 두 분이 합심해 운영했다. 비슷한 나이또래라서 그런지 사장님들과 금방 친해졌다. 오고가다 인사를 건네기도 했고, 마감 때문에 얼굴을 일주일 이상 못 비추자 “한동안 안 오셔서 무슨 일 있으신 것 같아 걱정했어요”라는 따뜻한 관심이 주고받는 친분을 쌓았다. 그렇게 자주 가니 사장님들이 일본 여행에서 개인적으로 사온 사케를 내주시며 즐겁게 수다를 떨기도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자주 욕짓거리를 해댔다. 처음에는 예쁜 말, 착한 말로 돌려 말하거나 모든 걸 다 이해한다는 듯 대인배 코스프레를 하곤 했는데, 술이 한잔, 두잔 들어가고 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설움이 터졌다. 유독 심한 날이면 사장님들은 바닐라맛 아이스크림처럼 달달한 모찌를 내어줬다. 아무말 안 했지만 손님의 기분까지 토닥이는 섬세함에 위로를 받는 기분이 진짜 서비스였던 추억의 공간.
모찌만큼 달달했던 슌지츠는 이제 없다. 인스타그램에 공지 하나 없이 문을 닫는 날이 이어지다가 돌연 문을 닫았다. 망원동 월세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치솟아서 가게 운영이 힘들어져 어쩔 수 없이 문을 닫게 됐다는 비보를 들은 후 몇 주동안은 그 앞을 지나다니지 못했다. 괜스레 생각이 나서, 여기 말고 다른 술집을 가기가 싫어져서.
“그러고보니 그때는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그래봤자 일이 년차였으니 뭐든 힘든 시기였지, 뭐. 윗사람 하나 없이 우리가 알아서 해야했잖아.”
얼큰하게 오른 술 기운에 젓가락을 공중에 휘휘 저었던 날들이 떠올랐다. 잡지 한 권을 하기도 힘들었는데, 거기에 완전히 새로운 잡지의 기획부터 구성, 취재, 원고, 교정교열 등을 한 달 안에 해결해야 했다. 분명 시계를 봤을 때 오전 11시였는데, 정신차리고보니 오후 6시였던 황당한 경험이 며칠이나 반복됐던 시기였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답답해서 버스를 타고 출근하면서 창밖을 바라보며 훌쩍거리기도 했고, 원고를 마감할 때는 화장실 사건이 있었다. 화장실에 갔다가 내가 볼일을 보러 들어갔다는 걸 까먹고 변기에 앉아 한숨을 쉬다가 바지를 내리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기가막혀 헛웃음이 터진 적도 있다. (그때 문 밖에서 내 웃음 소리를 들은 직원들은 실성한 줄 알았겠지.)
“그것만 있었나. 사람이 더 힘들었어.”
그렇지, 일도 일이지만 사람도 많이 힘들었어.
그래서 술 많이 마셨지.
원고가 다 마무리되면 편집 후 독립출판물을 제작할 예정입니다.
평일 내내 하루에 하나씩 업로드할 예정이지만,
제가 백수라 마음 내키면 놀아버릴지도 몰라요~!
(혹은.... 구직 준비로 인한 갑작스러운 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