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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ky Mar 14. 2020

#03-1 퇴사하려니 강제소환

모츠나베와 사케 많이

모츠나베와 사케 많이모츠나베와 사케 많이

신촌 개골목. 흔히 떠올리는 신촌의 번화한 골목에 비하면 사뭇 다른 정취를 가진 조용한 동네 골목이자 신촌 일대 직장인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오래된 벗. P와 나도 이 골목을 자주 찾는다. 우연히 발견한 이자카야 쿠라가 취향을 제대로 저격해버린 바람에 일주일에 서너 번은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듯 들락거렸다. 얼마나 취저인가 하면 일본인 종업원들이 일하고 있고, 주인장님의 음식은 일본에서 먹어본 꼬치구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사장님은 한국분인데, 인연이 깊은 듯 일본 손님들이 꽤 자주 찾아오는 듯하다.) 뭐니 뭐니 해도 가게 한 편에 놓여있는 수조가 참 귀엽다. 큰 키에 한 덩치 하는 사장님이 키우는 반려 새우가 사는 작은 수조 세 개. 듬직한 사장님이 반려새우에게 먹이를 주는 상상을 하면 신이 사장님을 구성하다가 실수로 귀여움을 한 바가지 쏟아버린 건 아닌지 의뭉스럽다.



퇴근 후 자연스럽게 쿠라를 찾았다. 쿠라의 문을 열면서 우리는 잠시 현실에서 벗어난다. 테이블(우리는 언제나 창가 자리에 앉는다. 커다란 창을 통해 건너편 카스타운이 보이는데, 카스타운의 숨은 주인장 고양이 꼬미가 외출하고 귀가하는 모습을 발견하면 오늘은 행운이 깃들였다며 기분 좋게 술 한 잔 더 시키는 재미가 쏠쏠)에 앉자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오기도 전에 P가 물었다.


“뭐 마실 거야?”


“모스케. 오빠는?”


“나는 잔파 블랙. 그럼 모츠나베 먹을까?”


보통은 안주를 고르고 술을 고르겠지만, 우리는 술을 고르고 안주를 고른다. 언제나 그런 건 아니고 쿠라에서만. 이곳의 음식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사장님이 서비스로 주는 메뉴에 없는 요리 조차 '그저 그런 맛'은 없으니 술만 고르면 된다. 그래서 우선 술부터. 종업원이 메뉴판을 내려놓자 P는 황급히 종업원을 붙잡고 주문했다.



“모스케, 잔파 블랙, 모츠나베 미소요.”


종업원은 얼음이 담근 술잔 2개를 가져와 내려놓고 보스케와 잔파 블랙을 가져왔다. 족히 900mL는 될 것 같은 잔파 블랙 병과 모스케 병. 보스케는 두 손으로 잡고 따라야 할 정도로 커다랬다. 향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꽉 닫아둔 뚜껑을 따고 얼음잔에 술을 붓는데 보리소주 향이 물씬 올라왔다. 투명한 모스케가 얼음을 타고 잔 밑바닥부터 점점 차올랐고 반 정도 찼을 때 컵 잔 속에 가지런히 쌓여있던 얼음이 딸그랑 무너지면서 한 방울이 내 손등에 튀었다. 본능적으로 손등을 훔쳤다.


“햐... 좋다.”


미안하다던 종업원이 웃었다. 향만 맡아도 취해버릴 것 같은 즐거움이 본능적으로 표출된 걸 어찌하겠나. 술은 P가 먼저 먹자고 했지만 내가 더 신이 나 잔을 내밀고 건배를 재촉했다.


 “짠~”


잔을 부딪치고 한 모금. 소주보다는 천천히 적게, 고량주보다는 조금 더 입안에 머금고 온 혀로 보리소주의 향을 한껏 맛봤다. 혀 밑 침샘을 자극하는 진한 보리향과 소주 맛에 온몸이 저릿저릿 떨렸다. 하루 종일 한숨을 내뱉어서 속이 텅 빈 것 같았는데 그 자리를 모스 케가 가득 채웠다.


“나도 이제 정~말 회사 그만둔다!”


“그러게. 한결 마음 편해졌어.”


 P는 내심 나만 두고 나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좀 놀랐어. 너도 몇 달 뒤면 나가겠지 했는데 이렇게 바로일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제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결론을 내렸다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편이다. 겁도 많고 낯도 많이 가리지만 일단 해야 되는 상황이 오면 잔머리를 굴려서라도 방법을 찾아 해낸다. 지난 4년간 회사에서 했던 모든 일을 다 그렇게 해냈다. 종이를 반으로 나눠야 할 때, 도구가 없으면 종이를 접어 접힌 면에 살짝 침을 바르거나 손톱으로 꾹꾹 눌러 천천히 뜯어내면 매끄럽지는 않아도 종이가 잘라지듯 말이다. 무식하면 용감하고,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고. 무서운 걸 모르니 안 되는 일을 붙잡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되게 했고, 회사와 나를 너무 동일시해서 손해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남다른 추진력 덕분에 이 회사에 입사도, 퇴사도 가능했던 거겠지.



4년 전, 한국잡지협회 산하 기관인 잡지교육원에서 취재기자 양성과정을 다니면서 P와 나는 잡지사 취업을 준비했다. 내 경우 많은 교육원생이 가고 싶어 했던 커피 산업지에 붙었다. 커피라고는 아메리카노와 라테 밖에 모르던 시절이라 남은 교육기간 동안 커피 공부나 할 요량으로 서점에서 이런저런 책을 사 읽던 시기였는데, 덜컥 다른 잡지사의 대표에게 전화가 왔다. 한 달 전에 교육원 수업 잡지사 인터뷰 과제로 질문지를 보냈던 잡지사였는데, 그곳이 무척 가고 싶어서 마지막에 인력 충원을 하게 되면 꼭 연락 달라고 메일을 남겼다. 그 답이 커피 잡지사에 입사하기 4일 전에 왔다.



모두가 부러워했다. 과제 차 연락을 했을 때도 거긴 답이 안 올텐데 왜 하냐고 말리는 사람들도 있었다.그래도 고집이 세 무작정 메일을 넣어봤고 기적처럼 삼 일만에 회신이 왔다. 간단하지만 나름대로 성실한 답이 돌아왔다. 그 인연이 면접과 입사까지 이어져 4년간 이 회사를 다녔다.


 “뼈를 묻겠다더니.”


뼈를 묻으려 했지. 나도 내가 이렇게 될지 몰랐다. 나는 내가 이 매체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농담이 아니고 첫 직장이지만 평생직장 해야겠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런데 최근 그 믿음과 사랑이 흔들렸다. 허울뿐이었나.


P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살짝 내려다보며(P가 나보다 앉은키가 크니 허리를 쭉 펴고 앉으면 나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든다) 잔파 블랙을 마셨다. 짜증이 났지만 사실이라 별말 않고 모스케를 마셨다. 입사하기 전부터 잡지는 하향 산업이고, 에디터의 월급은 쥐꼬리고, 대우가 얼마나 안 좋은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교육원에서 가장 먼저 알려준 게 에디터 평균 연봉이었다. 그땐 그 돈으로도 괜찮았다. 나는 멋있는 에디터가 될 줄 알았거든. 머금었던 모스케를 삼켰는데도 입안에서 보리향이 맴돌았다. 입을 가만히 다물고 있기 어려울 정도로 독한 술. P는 모스케보다 더 도수가 높은 잔파 블랙을 반 잔이나 마신 상태였다. 독한 놈. 그러니까 일을 그렇게 독하게 하지.


“그래도 여기서 좋은 경험 많이 했어.”


내 말에 P가 또다시 웃었다.


“그렇지 좋은 경험 많이 했지.”


종업원지 조심스럽게 모츠나베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일본식 나베 냄비에 짭짤하고 고소한 미소를 푼 국물에 몽글몽글한 기름이 붙어 있는 막창, 양상추와 말린 우영이 잔뜩 담긴 모츠나베가 끓고 있었다. 군침이 돌았다. 입안 가득 쌉싸레한 모스케 맛이 가시기 전에 뜨거운 국물 한 숟가락만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래, 맛보는 척 딱 한입만, 한입만 먹어보자.





독립출판물  『정말 술 마시게 하는 퇴사』 연재


원고가 다 마무리되면 편집 후 독립출판물을 제작할 예정입니다.

평일 내내 하루에 하나씩 업로드할 예정이지만,

제가 백수라 마음 내키면 놀아버릴지도 몰라요~!

(혹은.... 구직 준비로 인한 갑작스러운 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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