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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ky Mar 12. 2020

#02-2 드립커피와 퇴사 예정자

퇴사 예정자들의 대화

더럽고 치사하다. 한숨이 앞선 건 빈정이 상해서가 아니라 서운해서였다. 휴가를 쓸 생각도 없었지만, 못 쓰게 할 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었지만, 쓰고 싶어도 시간이 없어서 못 썼겠지만 그만두겠다는 말에 대표가 가장 먼저 걱정한 게 휴가라니. 그만둔다는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서 구구절절 털어놨던 고민 중에 내가, 우리가 나간 후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회사를 걱정하며 인수인계 확실하게 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내가 바보 같았다. 이 일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쏟아부은 내 4년은 대표에게 신뢰를 받기에 턱없이 부족했던 건가. 휴가를 반납하고 단행본을 만들었고, 주말을 반납하고 최대한 마감 일정을 맞추기 위해 브레이크 고장 난 폭주 기관차 마냥 밟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 신입이 봐도 똑같이 따라만 하면 업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해놓기 위해 주말까지 반납하려 했던 나는 바보였나.



'대나무숲' 카톡방을 켰다. P와 K, 내가 처음에는 함께 쓰는 기사의 방향성이나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만든 카톡방이지만 점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일이 잦아지면서 점점 '대나무 숲'이 됐지.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를 보면 카톡방을 헷갈려서 직원들끼리 서먹한 상황을 초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내게 결코 그런 경우는 없다. 채팅방 이름을 확실하게 나눠놓기 때문.)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얼른 자리에 앉는 P를 붙잡고 빨리 컴퓨터부터 켜라고 했다. P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대답도 하지 않고 바로 컴퓨터를 켰다. 갓 내린 커피를 호호 불었다. 커피 위에 뜬 기름을 입김으로 밀어내며 조금씩 마시고 심호흡 한 번.


이렇게 연락 왔어.



캡처한 카톡 내용을 전했다. 물론 반응은 나와 비슷했다. 어차피 쓸 생각도 없었지만 참 기분, 별로라고. P는 이미 그럴 줄 알았다며 아무렇지 않아 했고, K는 자신의 어이없음보다 내 분노를 토닥여주기 바빴다.(가끔 K는 나보다 언니 같아서 실수로 언니라고 부를 때가 있었지.)



언니 그런데 우리 지금까지 연차도 월차도 없이 일해서 그거 대신에 장기 휴가 줬던 거잖아요. 그럼 이거 엄연히 돈으로 환급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K의 말이 맞다. 강한 긍정을 하고 싶어서 이모티콘을 찾다가 마땅한 게 없어 K를 보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렇지.”


“그렇죠?”


 분명 나는 K의 의견에 동의했는데 K는 힘없이 말했다. 강한 긍정은 강한 부정이랬다. 우리 모두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입 뻥끗하지 않을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우리는 우선, 이 지옥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으니까. 몽상과 망상을 구별도 못하는 편집장 겸 대표 밑에서는 더 이상 일할 수 없다.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인지 못하는 사람을 설득하려다가 오히려 상처 받은 우리를 달래야만 했다. 그런데.. 다들 너무 착하고, 실속 없어서 월급이 안 나와도 말 한마디 못하는 사람들이라 퇴사한다고 해서 그렇게 강경한 대처를 할 수 있을까? 일단 감정을 가라앉혀야 한다. 한 달만, 딱 한 달만 참자.



한참 열불을 뿜어내고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목이 칼칼했다. 창문을 열어놓고 자서 그런지 편도선이 부은 것 같았다. 커피는 생각보다 금방 식었다. 차갑지는 않은데 음료 마시듯 꿀꺽꿀꺽 마셔도 될 만큼 미지근했다. 그나마 뜨거울 때는 마실만 했는데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중간이 되니 한약을 데운 듯 쌉싸래했다. 뜨거운 물을 더 붓고 싶어 탕비실에 다녀오려는데 P에게 카톡이 왔다.



일이 잘 안 된다.
이제 술 그만 먹고 진짜 일해야지.

 


P가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하면 먹지도, 한눈을 팔지도 않는다. 구두로 뭘 물어보면 카톡으로 간단하게 답이 온다. 아무도 상대하지 않고 정말 일만 한다. 식은 커피를 싱크대에 반 정도 버리고 뜨거운 물을 더 부었다. 처음처럼 커피가 뜨거워졌지만 확실히 덜 쓰고 덜 진했다.



오후 3시가 되자 대표가 출근했다. 밝고 쾌활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고 직원들은 그에 맞춰 반응했다. 며칠 만에 보는 대표였다. 그동안 어디를 다니는지 사무실에는 얼굴도 안 비치고 카톡으로 업무지시를 내리던 사람이 오늘 출근했다. 그리고 30분 뒤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갔다. 대표가 나가자 P는 부리나케 대표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동안 못한 보고도 해야 했고, 확인받을 기획도 있었는데 오자마자 사라졌다. 그것도 P가 프린트하고 있던 중에. 전화는 받지 않았고, 카톡은 읽고 답하지 않았다. (1시간이 지나서 답이 왔다.) 평소 화가 나도 티 내지 않던 P가, 술 마신 다음 날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P가 담배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P의 뒤를 따라갈까 하다가 마시던 커피가 또 식어서 탕비실에 갔다. 아침에만 해도 까맣던 커피가 점심시간쯤에는 맑은 고동 빛이 돌았고 오후 4시가 가까워지자 진한 둥굴레차 같은 색이 됐다. 커피를 버리고 뜨거운 물을 담아 자리에 돌아오니 P에게서 카톡이 왔다면 카톡 창이 깜빡거렸다.



 술 마시러 가자. 내가 살게.


그래, 아무래도 오늘 술을 마셔야겠지?




독립출판물  『정말 술 마시게 하는 퇴사』 연재


원고가 다 마무리되면 편집 후 독립출판물을 제작할 예정입니다.

평일 내내 하루에 하나씩 업로드할 예정이지만,

제가 백수라 마음 내키면 놀아버릴지도 몰라요~!

(혹은.... 구직 준비로 인한 갑작스러운 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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