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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ky Apr 11. 2020

#09 제주 여행, 두 번의 시련과 한 번의 행운

혼자 여행의 서막

비행기가 요동쳤고 꼬맹이들은 우악스럽게 소리 질러댔다. 덩달아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분명 내일이나 되어야 태풍의 영향권에 든다고 했는데 제주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이건 뭐 파도타기도 아니고 비행기 날개가 흔들리면 1초 후 내 몸이 붕 떠올랐다. 얼떨결에 무중력 체험까지. 마침 오디오북을 듣고 있었는데 4D로 관람하는 기분이었다. 비행하는 1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지지 않았고 심지어는 조종사가 다시 안내하기 전까지 승무원들 모두 착석하고 안전벨트를 하고 있으라는 방송이 나왔다. 손바닥에 계속 땀이 맺혀 자꾸만 미끄러졌다. 이제 막 혼자 여행을 시작했는데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망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동공 지진에 안절부절. 옆자리에 아무도 안 앉길 다행이지. 하마터면 모르는 사람에게 폐 끼칠 뻔했다.



비행기는 무사히 제주공항에 착륙했다. 배낭을 멘 채 뒤도 안 돌아보고 공항을 벗어났다. 운전면허증도 없는 뚜벅이에게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탑승 연착으로 예정보다 30분이나 늦게 제주도에 도착했고 첫째 날 숙소가 위치한 함덕까지 버스를 타고 가려면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점심도 못 먹었는데 7시가 넘으면 미리 찾아둔 음식점에서 저녁 식사를 할 수 없다. 함덕행 노선을 검색하고 정류소에 서서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버스를 사십 분 때 못 탔다. 스마트폰에 버스 도착 알람이 떠서 이리저리 살펴봤는데 버스는 오질 않고, 버스가 오지 않아 다시 도착 시간을 확인해보니 버스는 이미 다음 정류소를 향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배차시간도 긴데 이 짓을 두 번이나 했다. 요동치는 비행기 안에서 첫 시련을 겪은 지 얼마나 됐다고 두 번째 시련을 맞았다. 타지 일본에서도 헤매지 않던 길을 제주도에 헤매다니. 게다가 방향 감각만으로도 길을 잘 찾는 내가 지도를 보고 있으면서도 버스를 못 탔다. 공항이 번잡해서 버스를 놓친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잔머리를 굴렸다. 공항 다음 정류소가 같은 버스를 타고 거기에서 버스를 기다리면 탈 수 있다. 그래서 다음 정류소가 같은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버스가 도착할 때쯤 내 뒤에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내가 타려는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왠지 싸한 느낌이 들었지만 우선 공항을 벗어나야겠기에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이때 깨달아야 했다. 내가 버스에서 내리지 못할 거란 걸.



다음 정류소는커녕 다다음, 다다다음 정류소에서도 내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밀어대는 통에 버스 안쪽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행여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될까 봐 뚱뚱한 배낭을 앞으로 메고 끌어안은 채 겨우 서있었다. 앞사람과 뒷사람, 양 옆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 버스가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멈추면 멈추는 대로 버스에 몸을 맡겼다. 시내에 다 달아서야 한두 사람이 버스에서 내려 겨우 발 디딜 틈이 생겼다. 기회가 생겼을 때 내려야 했다. 이번에 내려야 그나마 돌이킬 수 있었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 내리는 문까지 죄송합니다를 열 번쯤 반복했고 겨우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니 이미 주변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깔렸고 주변에는 가게나 가정집, 하물며 그 흔한 가로수 하나 없는 불빛 한줄기 찾을 수 없는 깡촌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나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봤다.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들미고개에 있는 시골집에서 밤 산책하다가 봤던 그 장면이다. 망했네. 불행 중 다행인 건 얼마 지나지 않아 함덕행 버스가 왔다. 버스에 타서 기사님 바로 뒷자리에 앉아 몇 시간 내내 걱정 어린 카톡 메시지를 보낸 P와 K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 몇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고 있어.


K에게만 답했다. 괜히 P에게 카톡을 보내면 칭얼댈 게 뻔해서 나나 P의 정신 건강을 위해 참았다. 카톡을 보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K에게 답이 왔다.



K: 언니 식사는 하셨어요?


초연: 아직 못 먹었어. 가서 짐 두고 먹어야지. 감리는 끝났어요?


K: 아까 끝나서 지금 P 선배랑 양갈비 저녁 먹으러 왔어요.


초연: 수고 많았어요. 괜히 나 때문에 둘 다 고생시킨 것 같아. 미안해요.



배고파 죽겠는데 P가 K와 저녁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괜히 심술이 났다. 나는 괜히 귀찮게 할까 봐 연락을 안 했더니 지는 아주 맛있게 양고기를 찹찹 거리고 있단 말이지? 나는 더 맛있는 음식을 먹겠노라. #함덕 #함덕_맛집 #함덕_술집 #함덕_이자카야 등 인스타그램에 온갖 검색어를 대입하며 술집을 찾았다. 횟집이나 고깃집은 혼자 가기 부담스럽고, 술집은 대부분 '펍'이라 식사를 해결할 수 없고, 그나마 있는 이자카야는 꼭 제주도가 아니라도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팔았다. 그러다 피드에서 '나도 섬이다'라고 적힌 나무 간판을 단 가게를 발견했다. 메뉴도 마음에 쏙 들었다. 평소 좋아하는 핸드릭슨과 흑돼지김치찜을 팔았다. 더 볼 것도 없었다. 오늘은 여기다.



 숙소에 들려 가방을 내려놓고 우산을 챙겨 '나도 섬이다'로 향했다. 큰길을 타라 5분 정도 걸으면 됐다. 태풍이 가까워졌는지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다행히도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다. 가게는 인스타그램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꾸밈없는 단출한 회색 건물에 나무 간판 하나만 걸린 빈티지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우려와 달리 손님이라고는 남성 두 명이 전부여서 조용히 저녁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게에 들어서자 두 손님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꽂혔다. 꽤 민망했다.



“손님 왔네요, 형님.”



혼자라는 것에 민망해 문 앞에서 쭈뼛대자 주방에서 한 남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로빈슨 크로소처럼 덥 수록하게 기른 턱수염과 반 묶음 단발머리, 음식점에 온 건지 빈티지 샵에 온 건지 헷갈릴 정도로 힙하디 힙한 사장님의 분위기에 휩쓸려 홀린 듯 바에 앉았다.



“여행 왔어요?”



사장님이 메뉴판을 건넸다. 말투는 심드렁했지만 관심 가득 묻어나는 표정을 지었다.



“네. 지금 막 도착했어요.”


“그럼 밥도 못 먹었겠네?”


“저녁은커녕 점심도 못 먹었어요.”


“그러면 우선 맥주부터 마셔요. 우리 집은 오면 맥주부터 한잔 시원하게 마시고 시작해야 해.”



사장님이 실리콘 코스터 위에 맥주 한 잔을를 내려놓으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맥주를 마실 수 있을 만큼 쭉 마셔요. 그리고 마실 때는 한쪽으로만 마셔야 에인절 링을 제대로 볼 수 있어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고, 술집에 갔으면 술집 사장님 말을 따라야 한다. 두 눈 질끈 감고 목구멍이 따끔거려서 못 견딜 때까지 맥주를 쭉, 들이켰다. 오늘의 시련이 맥주와 함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혼자 왔는데 안주 하나 시키지 말고 내가 조금씩 이것저것 줄테니까 먹어봐요.”



반사적으로 작게 물개 박수를 쳤다. 하루치 행운을 이 가게에 몰아넣느라고 하루 종일 운이 없었나 보다. 나의 여행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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