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가능한 단계가 아니네
지난밤, 함덕에 도착하고 바닷가를 한번 걷지 않은 통에 아침 산책 겸 무작정 해변을 걷기로 했다. 바닷바람은 무척 거셌다. 우산을 쓸 정도는 아니었지만 10분 이상 걸으면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을 것 같은 비가 내렸다. 기왕이면 해변가 카페에 앉아 잠깐 일을 할까 싶었는데, 제주 감성 맘껏 느낄 카페에는 이미 사람이 그득그득했다. 어쩔 수 없이 나름 해변을 내다볼 수 있는 스타벅스에 들어가 자리 잡았다. 주문한 커피가 테이블에 내려놓자마자 창밖으로 검은 비닐봉지가 날아왔다. 차가 다니지 않는 거리를 크게 원형을 그리며 날리더니 바닥을 이리저리 쓸고 다니다가 나무만큼 떠오르고, 다시 바닥을 몇 번이고 쓸었다.
P: 일어났어? 바람 많이 분다던데 괜찮아?
오전 10시 10분, 출근한 P에게서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마감도 쳤겠다 자료 조사와 회의를 하는 첫 주라서 P가 내게 관심 가질 틈인 났나 보다. 나는 날아다니는 비닐 봉지를 촬영한 동영상을 P에게 보냈다.
초연: 비닐 봉지가 춤을 추네.
P: 흥겨운 비닐봉지다.
초연: 오늘 대표님 출근했어? 회의한대?
P: 출근 아직 안 하셨고, 회의한다는 말은 있었어.
초연: 아직 확정은 아니구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 코너 기획이랑 전체 주제 정리해서 보내줄게.
P와의 대화를 멈추고 바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켜고, 커피 한 모금 마시고 인터넷 창을 켠 순간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쳤다. 조금만 더 지체했다면 저 비바람을 다 맞아 물에 빠진 생쥐꼴이었겠구먼. 이 정도의 비바람이라면 우산을 쓰나 마나다. 사람들이 비를 피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한적했던 카페 안에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뒷문이 바람에 벌컥 열리는 바람에 근처에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옷이 젖어 간간히 비명 아닌 비명이 들리기도 했다. 나는 이어폰을 꽂고 본격적으로 자료를 정리하고 찾기 시작했다. 이번 주제는 시대의 흐름을 잘 타되 독자들의 흥미를 돋울 수 있는 것을 잡고 싶었다. 하던 대로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얻은 재택근무니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초연: 이거 같이 보고 부탁해. 회의할 때 내 자료도 필요할 것 같아서.
P: ㅇㅇ 역시 하던 가닥이 있으니 잘 정리했군.
초연: [시스템] 초연의 경험치가 1 올랐다. 초연의 hp가 20 떨어졌다.
P: 이제 뭐할 거야?
초연: 이제 점심 먹고, 슬슬 다음 숙소 근처로 가야지.
제주도는 P와의 첫 여행지였다. 회사를 다니면서 처음 받은 여름휴가로 함께 계획한 여행지가 제주였고 첫날 숙소가 함덕에 있었다. 그때 우리는 함덕 호텔 옥상 펍에서 오션뷰를 내려다보며 맥주를 마시고 진짜 사회인, 직장인이 된 것 같다고 돈을 버니까 이렇게 여행도 온다고 깔깔 웃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비만 안 왔어도, 바람만 거세게 안 불었어도 해변에 자리 잡고 앉아 맥주 한 캔 마셨을 텐데, 아쉬웠다. 구좌읍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비바람을 뚫고 정류소를 향해 걸었다. 구글 지도 앱을 켜고 잘 찾아갔다. 첫날의 경험이 도움이 많이 됐다. 제주의 버스 배차 시간은 기본 15분에서 30분이므로 시간 안에 타지 않으면 버스정류소에서 죽치고 앉아 스마트폰 게임만 해야 한다. 버스 도착 10분 전, 부지런히 걸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목이 탔다. 이런저런 날씨 관련 뉴스를 찾아보니 오늘 밤부터는 태풍이 제주에 상류 할 예정이라는 소식이었다. 사실, 오늘 숙소도 우도 배편이 끊어져 우도 숙소 측에서 취소하는 바람에 급하게 구한 곳이다. 하는 수 없이 1일 제주도민 체험을 자처했다. 버스에서 내려 버스정류소 근처 편의점에서 작은 캔맥주 하나를 샀다. 몇 시간 전에 비해 확실히 날이 좋아졌다. 이게 바로 태풍의 눈인가. 짧게 즐겨볼까. 숙소까지 15분 정도 걸으면서 맥주 한 캔을 천천히 비웠다. 첫 모금은 맛보다는 목을 축이려는 의도였고, 다음부터는 전날의 숙취를 덜기 위함이었다. 숙취를 덜기 위해서는 술을 마셔야 한다. 적당한 알코올 농도를 유지하면 활기를 찾을 수 있다. 일하면서 거의 매일 같이 술을 마시면서 터득한 방법인데, 이렇게 평일 5일을 하고 나면 토요일은 기절. 숙취와 피로를 한 번에 날리는 효율(?)적인 방법이다. 한 캔을 홀짝홀짝 마시며 골목을 누비고 다니다가 숙소 앞에 도착했다. 2층 주택, 가정집 같은 분위기의 숙소. 듣기로는 1층은 게스트하우스고 2층은 주인 분들이 산다고 했다. 무거운 짐부터 내려놓고 싶었지만 입실 시간 전이기도 하고, 점심으로 먹은 몸국을 소화시키고 싶어 무작정 해안도로로 향했다. (해안도로까지 5분 거리밖에 안됐다)해안도로에는 짙은 고동색 해초류가 널려있었다. 분명 도로인데 여기저기 해초류가 그득했다. 지나가는 자동차들은 이 해초를 피해 지그제그로 차선을 변경하며 지나갔다. 누구도 그 해초더미를 밟지 않았다. 누군가 필요에 의해 널어둔 것이라는 느낌적인 느낌. 해안도를 걷고 또 걸었다. 파도가 매섭게 바위에 부딪치고, 애매랄드 빛 바다는 온대 간대 없고 황색 바다가 요동쳤다.
잠깐 해안도로 안전바에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 이곳에 온 거니까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했다. 남들은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는데, 나는 왜 걸으면서 생각하지 못하는 건지. 걸을 거면 그냥 걸어야 하고 생각할 거면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해야 한다. 또, 생각하려고 노력해야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양 뺨을 후려치는 바닷바람을 맞아가며, '이것이 진정한 풍욕이다'를 속으로 몇 번이나 되새기며 생각이란 걸 하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남들은 신경 쓰지 않은 학벌에 대한 스트레스, 그래서 이 회사에 취직했을 때 느낀 희열, 선임 에디터 공석에 대한 압박, 함께 일하던 교정교열자가 나에 대해 대표에게 했던 망언,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스스로 정립하지 못했다는 혼란, 이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좌절 등 생각하면 할수록 절리는 커녕 더 복잡해졌다. 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일을 계속한다면 나는 이러한 굴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자학하는 짓만 일삼으며 나를 좀먹어버릴 것 같았다. 내가 생각이란 걸 깊이 하면 안 되는 상태라는 걸 깨닫고 나서야 풍욕을 그만두고 다시 숙소를 향해 걸었다.
거의 숙소에 가까워졌을 때 문자 메시지가 왔다.
호스트: 초연 씨, 조심히 오고 계신가요? 오늘 태풍이 상륙한다네요. 제주의 태풍은 굉장히 위험해요. 그러니 늦지 않게 입실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연락드려요.
초연: 감사합니다. 지금 숙소 바로 앞이에요.
호스트: 지금 내려갈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