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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ky May 02. 2020

#12 1년 동안 두 번의 제주

잊고 싶은 제주 워크숍

 게스트를 걱정하는 친절한 호스트 부부였다. 여성 호스트분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공용 거실 테이블에 앉았다. 거실에는 웬만한 책방 저리 가라 다양한 책이 꽂혀 있고, 한 사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방은 독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쿠션이나 담요, 낮은 테이블이 구비되어 있었다.



“책은 마음껏 보셔도 괜찮아요. 그나저나 오늘 밤이 고비라네요. 밖에 나가지 말고 오늘은 그냥 안에 계시는 게... 굉장히 위험해요.”



제주도까지 왔는데 발이 묶였다. 확실히 바람이 매섭게 불어 나무고 풀이고 요란하게 흩날렸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커다란 주황 대야가 당근밭을 나뒹굴고 있었다. 밖에 나갔다가 저 대야가 날아오기라도 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다른 게스트 분은 없으신가요?”


“계세요~ 지금 자전거 종주 도장 찍으러 가셨어요. 금방 오실 거예요. 그런데, 저녁식사는 정하셨어요? 괜찮으시면 저희 아저씨가 요 앞에 전복돌솥밥 가게에 데려다 드릴 수 있어요.”


“아, 그러면 있다가 부탁드릴게요.”



오늘 밤 내가 묶을 방을 안내받고 짐을 풀었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 샤워를 하고, 컴퓨터를 가지고 공용 거실에 나와 창가에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컴퓨터를 켜고, 음악을 틀고, M에게 연락했다.



초연: 에디터들 회의해?

M: 회의 중이야. 꽤 오래 한다. 점심시간도 지났는데... 그나저나 제주도는 재밌냐? ㅋㅋ

초연: 재밌다. 근데 태풍 와서 발이 묶였어.

M: 부럽다. 혼자 제주도라니.

초연: 5월에 제주도 왔다가 진짜 내가 엄청 열 받았었잖아. 그거 풀려고 왔으니 잘 놀아야지.

M: 그래. 그때 억울했으니까. 이번에는 신나게 놀고 와요.



*


 지난 5월 회사에서 제주도로 2박 3일 워크숍을 왔었다. 에디터들은 취재를, 디자이너들은 숙소 정리나 식사를 담당하기로 했고 모두들 자기의 역할을 해냈다. 당시 P와 연애 중이었는데, 하루 종일 인터뷰 일정이 잡혀있는 나를 위해 아침마다 함께 산책도 하고, 틈이 나면 근처 카페나 오름에 다녀오자고 약속했다. 그 약속이 지켜질 리 없었다. 첫날은 밤늦도록 술자리가 이어졌고, 둘째 날은 바비큐 파티가 있어 P는 아침마다 침대 이불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이불을 끄집어 당겨 산책하러 가기로 했지 않냐며 생떼를 부려도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일 때문에 왔으니 다른 직원들이 제주 여행을 즐겨도 부러워하거나 괜히 기분 상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제주도에서 서울로 돌아온 날 P와 헤어졌다. 그때 내 불편하고 심드렁한 기분을 알아준 사람은 P가 아닌 함께 인터뷰 일정을 소화했던 사진작가분이었다. 제주도와 연이 깊은 작가분이 인터뷰 장소로 향하다가도 시간이 나면 해안도로에 차를 세우고 제주도의 바다를 즐기라고 시간을 주기도 했고, 이런저런 제주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가이드처럼 여행 기분을 북돋아줬다.



그렇게 끝나면 다행인 워크숍이었을 텐데. 사건은 바비큐 파티 날 터졌다. 그날 서귀포시에 있는 인터뷰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일찍 출발하려는 우리를 따라 대표님과 팀장님이 차량에 올랐다. 이동시간 동안 인터뷰 질문을 수정할 생각이었는데, 팀장님과 대표님의 대화 내용을 듣고 있기 힘들어 눈을 감았다. 디자이너들이 아침저녁으로 식사 준비를 하기러 했는데, 디자이너인 Y가 식사 준비도 돕지 않고 자기 밥만 먹고 홀랑 사라졌다는 팀장님의 한탄이 대표님의 화를 돋구웠다. 원래 Y는 J의 후임자다. 동료 직원의 개념을 떠나서 Y는 속을 알 수 없고, 안 되면 남 탓이나 하는 여우 같은 사람이라 솔직히 몇몇 직원들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감리만 갔다 하면 자기가 한 실수로 내가 대표에게 온갖 욕을 다 먹어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나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지만, 실수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겪는 일련의 일들을 두루 살필 줄 알아야 하는데 나이만 많았지 지혜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함부로 나쁜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어 나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나는 못 들었다.

나는 지금 잠을 자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거다.

나는 여기 없는 사람이다.

안 듣고, 안 보고, 말하지 않으리라.




인터뷰가 끝나고 바비큐 파티 음식을 사기 위해 마트로 향했다. 차 안은 조용했다. 간간히 대표님의 한숨과 팀장님의 멀미 호소를 제외하면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마트에 도착한 다음에야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다. 나는 카트를 끌고 대표님과 팀장님 뒤를 쫓아다녔다. 돼지고기, 소고기, 명이나물, 김치 등 카트 가득 음식을 담았다. 수박 한 통을 마지막으로 계산대로 향하는데 대표님이 내게 말했다.



“초연 씨, 지금 우리 장 보고 들어가니까. 다들 준비하고 있으라 하고, 에디터들한테는 손 하나 까딱하지 말라고 해.”



명령이었다. 망했다. 나는 이 혼돈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는데.... 차에 타자마자 전달했냐는 대표의 물음에 지금 하려고 한다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초연: 여러분, 편집장님의 전달사항입니다. 오늘 바비큐 파티 때 에디터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말래요.



물음표와 이유를 묻는 에디터들에게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그저 명령을 하달받은 것뿐이다. 나는 제주도 와서 취재만 다니는 것도 겨우겨우 참고있는데, 감정노동까지 해야하는 거지? 뭔데, 무슨 마가 꼈길래? 울화가 터진다...



초연: 나도... 나도... 이런 말 해서 불편해... 우선, 대표님이 전하라 해서.



수박을 끌어안고 앉아 괜히 수박을 두드렸다. 몸도 마음도 불편했다. 괜한 일들로 즐거워야 할 바비큐 파티가 불편하기 짝이 없고, 이때 이후에는 괜히 다른 직원들에게 미움 산 건 아닌지 걱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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