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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ky May 06. 2020

#14 우도 막걸리와 커피 한 잔

무릉도원 후 불편한 마음을 끌어안고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나는 여행의 본격적 시작을, 남성분은 여행의 마지막을 걱정하는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다음 목적지인 우도로 향했다. 어제는 태풍 때문에 배편이 모두 결항됐지만 오늘 아침에 선착장에 전화했더니 정상 운항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주도에 왔다면 우도를 반드시 가겠다는 욕심을 채워야 했다. 오늘은 우도를 가고 내일은 한 번도 올라본 적 없는 성산일출봉을 오를 거다. 별 계획 없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뚜벅이에게는 생각보다 빡빡한 일정이다. 캔맥주를 마시며 걸었던 길을 되짚어 버스정류소로 걸어갔다. 하룻밤 사이 태풍은 동해안으로 이동해서 더는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바람은 여전히 거셌다. 오토바이만 간신히 다니는 좁은 골목길은 비에 한껏 젖어 있다. 내 운동화도 걸을 때마다 틈이란 틈마다 물줄기가 뿜어 나왔다. 새 양말을 신어도 운동화를 신자마자 축축해졌다.



버스를 타고 30분가량 이동해 성산항에 도착했다. 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부랴부랴 뛰었지만 생각보다 정류소와 선착장이 멀리 떨어져 있어 배를 놓쳤다. 20분이나 남아 대기실에 앉았다. 가방이 너무 무거워 내려놓고 싶었고, 우도에서 뭘 먹으면 좋을지 찾아봐야 했다. 우도 안에서 식사를 해결하기에는 너무 비쌌다. 짬뽕도 만원이 넘었다. 예산 초과다. 자전거 대여로만 3만 원 정도인데, 만 원이 넘는 밥값을 감당하기엔 버겁다. 먹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서 고민하던 찰나 작은 종이 바람개비가 꽂힌 기념품 가게가 시야에 들어왔다.



'우도 땅콩 막걸리 팝니다'



여전히 애매랄드 바다를 자랑하는 제주의 바다를 구경하면서, 배 가까이 날아다니는 기러기를 구경하면서 우도에 도착했다. 배는 천진항에 정착했고 나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전기자전거를 대여했다. 우도는 제주에 오면 꼭 들리는 곳이라 정해진 코스를 따라 라이딩할 필요 없었다. 내 목적은 라이딩이 아니라 '우도 풍경 충분히 즐기기'니까. 초반에는 자전거, 오토바이 행렬을 따라가다가 왼쪽에는 말 두 마리가, 오른쪽에는 소 네 마리가 풀을 뜯어먹는 초원을 끼고 비포장 도로에 진입했다. 나를 뒤쫓던 한 커플이 내가 다른 길로 간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원래 코스로 돌아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 본격적으로 우도 곳곳을 누볐다. 제대로 된 담도 없는 목장, 넓은 밭, 사람이 사는 것 같지만 아무도 없는 지붕 낮은 주택을 지나 일반 자전거를 빌렸다면 중간에 포기했을지도 모를 높은 언덕을 마주했다. 크게 숨을 돌린 후 전기 자전거의 출력을 최대로 올려 페달을 밟았다.



바람이 부는데도 이마와 등에 땀이 맺혔다. 언덕 꼭대기에 놓인 돌 위에 앉아 가방에서 막걸리를 꺼냈다. 경치를 안주 삼아 시원하게 막걸리 한 잔 마시면 천국이 따로 없을 테지. 페트병에 맺힌 물방울을 옷으로 닦아내고 뚜껑을 열었다. 아, 생각이 짧았다. 막상 막걸리를 마시려니 잔이 없다. 진정한 병나발인가. 하늘과 바다의 경계선을 지긋이 보다가, 간간히 지나가는 오토바이 행렬을 보다가, 물질하는 해녀들을 보다가, 지붕이 낮은 집들을 하나 둘 세다가 막걸리 병나발. 나도 3년 전에 P와 저렇게 2인용 사륜 오토바이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렸었다. 아무짝에 쓸모 없는 미련이나 후회는 내려놓았는데 괜히 떠올라서 추억 삼아 잠깐 돌이켰다. 추억은 추억일 뿐이니까. 탁 트인 풍경 하며 고소하고 달달한 땅콩 맛 막걸리라니. 첫맛은 달고 끝 맛이 씁쓸했다. 뱃속 가득 들어찬 탄산이 트림 한 번으로 발산됐다. 아무 생각 없고, 배가 부르고, 바람이 선선했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아주 옅은 술기운에 자전거를 끌고 근처 책방으로 걸어갔다. 우도에 온 목적은 밤 수지맨드라미 책방 때문이었다. 책방 앞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책방 한편에는 벳찌나 책갈피, 엽서가 진열되어 있었고, 테이블에는 가지런히 놓여있는 책들을 놓여있었다. 독립출판물과 일반 단행 물을 천천히 살펴보다가 평소에 사야겠다 싶었던 책 2권과 브로치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앉을자리를 살폈다.



사실 밤수지맨드라미 책방지기에게 원고를 청탁한 적이 있다. 최근에 커피와 관련한 글을 받았는데 이곳 사장님이 내려주는 커피가 너무 궁금해서 마셔보고 싶었다. 찬 커피를 마시고 싶었지만, 뜨거운 커피가 진정한 커피라는 근거 없는 고집으로 뜨거운 커피를 주문했다. 계산대 옆에는 긴 나무 테이블과 작은 원형 테이블 두 개가 놓인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핸드폰 충전을 위해 콘센트와 가까운 원형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 구매한 책 중 한 권을 펼쳤다. 첫 장부터 천천히 읽어나갔다. 3장쯤 넘겼을 때 엔틱 한 잔에 가득 담긴 커피가 나왔다. 하얀 바탕에 알록달록한 꽃그림이 그려져 있는 잔이었다. 오른손으로 잔 손잡이를 잠고, 왼손으로 잔받침을 들어 고상하게 커피를 마셨다. 확실히 커피맛은 좋았다. 좋은데 덥다. 읽던 책을 가방에 넣고 긴 테이블에 놓여있던 낯익은 잡지를 가져왔다. 우리 잡지였다. 책방을 찾은 사람들의 손떼가 타서 표지가 너덜너덜했다.



종종 책방에 가면 내가 만든 잡지를 찾아본다. 어디에 놓여있는지, 몇 권이나 꽂혀 있는지, 책 상태는 양호한 지 등을 물가에 내놓은 자식 걱정하듯 그렇게 애지중지. 가끔 표지의 모퉁이가 구부러지고 책이 너덜너덜한 걸 발견하면 안타까운 마음보다 괜시레 뿌듯하다. 많은 사람의 손길을 타서 때가 탄 책을 보면 그 잡지가 유독 애틋하다. 그래서 유독 이 너덜너덜한 잡지가 사람들의 손길을 품고 있는 것 같아서 몇 번이고 어루만졌다. 나는 이 잡지를 마감할 때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고 편집을 했었지? 이 잡지를 읽은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좋은 콘텐츠를 전달한 게 맞을까? 정말 나는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잡지를 만들어 왔을까? 계속 물음을 던지다가 식은 커피를 마셨다. 호로록, 호로록. 그제야 쌉싸름한 맛이 느껴졌다.



책방지기에게는 인사를 건네지 못하고 책방을 빠져나왔다. 사실, 아직 원고료를 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에 입이 근질근질해도 참았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곳에서 책을 사고 커피를 마시는 정도가 전부였다. 원고료 입금 안 하는 건 내 탓이 아니지만 이럴 때 한없이 작아지는 내가 너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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