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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ky May 14. 2020

#15 밀크티를 마시러 가기까지

경력자를 뽑아야 하는 이유

재택근무 첫날은 모든 게 낯설다. 평소보다 1시간 늦게 일어났고, 30분 더 침대에서 뒹굴었을 뿐인데 왠지 모르게 죄책감에 짓눌렸다. 선천적 개미가 배짱이 팔자 쫓다간 가랑이가 찢어진달까. 대차게 쉬어보겠다고 욕심부린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온몸이 근질거린다. 우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고 수건과 옷가지를 챙겨 화장실에 들어갔다. 변기 뚜껑을 덮고 앉아 칫솔질을 시작했다. 내가 없어도 회사는 돌아간다. 제주도에서 아무리 대표가 닦달 전화와 카톡 메시지를 보냈어도 결국 대신해주던 에디터들에게 연락해보면 이미 다 해결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없어도 사람들은 출근하고, 회사는 돌아가고, 잡지는 나온다. 멍, 때리다가 입안에서 거품이 넘쳤다.



 미처 못 챙긴 자료도 있고, K와 밀크티도 마시고 싶고, 저녁에는 P와 술도 마시고 싶고, S와 수다도 떨고 싶어서 무작정 사무실로 향했다. 어제 사무실에 새 에디터가 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토록 원하고 원했던 경력직이 온 댔다. 새 에디터를 경력으로 뽑아야 한다는 의견은 꾸준했다. 악순환의 연속을 끊어야 했다. 근속자의 퇴사 후 빈자리는 경력자가 아니라 신입이 메우고, 신입을 챙길 틈도 없이 일하다 보면 신입이 못 견디고 퇴사했다. 그러면 다시 신입이 들어오고 있는 시간 없는 시간 쪼개 일을 다시 알려주고 나면 또 못 견디고 퇴사했다. 우리 모두 신입이 견디지 못하고 나가는 이유를 아는데, 대표만 그 이유를 몰랐다. 왜 그만두는 건지, 다들 잡지 일을 만만하게 본다고 투덜거리는 대표에게 애써 용기 내 이런저런 악순환을 토로하면 대표는 우리가 언제 안 그런 적이 있냐며, 다들 신입으로 들어오지 않았냐며 오히려 우리를 타박했다. 다들 좀 챙겨주라고, 다들 자기 일하느라 바빠서 못 챙기는 거 아니냐고, 경력이 들어온다고 다를 것 같냐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한숨을 삼켰다. 



이번에는 대표도 안 되겠는지 경력을 뽑았다. 이것도 참 내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면접을 보기 전, 대표가 내게 전화를 했다. 그날은 모처럼 시간 맞춰 퇴근하고 집에서 저녁을 먹은 후 엄마와 식탁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차였다.



“초연 씨, 이번에는 경력직을 뽑으려고 해. 아무래도 초연 씨가 오래 다녔고 다른 경력이 들어오면 지금의 사이클을 지키려고 초연 씨랑 부딪치는 일도 있을 거야. 괜찮겠어?”



이건 무슨 얼토당토... 누구보다 경력직을 원한 게 나였다. 의견 대립으로 P와 싸우는 것도 지쳤고, 나와 P 사이에서 눈치 보는 K에게 미안했다. 의견을 조율해줄 윗사람이 필요했다. 사실 이 윗사람의 역할을 대표가 해주면 좋겠지만 회사 실정이 그렇지 못한 터라 이것마저 바랄 수 없었다. 대표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내가 그동안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디자이너와  마케터가 있었던 터라 그들에게 내가 알게 모르게 티를 많이 냈나 보다. 내가 그들을 싫어했던 건 일을 똑바로 못해서인데, 감싸줬어야 했나? 옆에서 K가 자기 일도 아닌 걸 떠안고 하는 걸 지켜보기만 했어야 했나? 픽셀 다 깨지고 색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데이터 때문에 감리 담당이었던 내가 대표에게 아무리 욕을 먹어도 그 사람을 좋아했어야 했나? 자신들은 대표에게 한 마디 제대로 못해서 총대 매고 대표와 싸워대는 내게 앞 자비라느니, 스파이라느니 얘길 들어도 바보처럼 가만히 있었어야 했나? 며칠 뒤 혼자 끙끙 앓다가 P와 K에게 이런 얘길 털어놓고 나서야 머리가 맑아졌다. 이건 내 문제이긴 하지만 결국 이 악순환과 회사의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절대 해결되지 않을 일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사무실까지 걸어가는 시간은 5분 남짓. 그 5분 동안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기사 자료는 어디 있는지, 기자들 연락처는 어디 파일에 정리해뒀는지 등 구글 공유 프로그램만 켜도 금방 찾을 수 있는 자료에 대해 물어왔다. 하나하나 어디에 가면 파일이 있고, 그 자료는 어디에 정리해뒀고를 구구절절 적다가 그만뒀다.



초연: 저 지금 사무실 앞 신호등이에요. 금방 들어가니까 가서 말씀드릴게요!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라서 익숙해질 법한데,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도대체 누가 데스크고, 누가 직원인지 알 수가 없다. 모든 일에 관한 보고는 빠트리지 않고 하는데, 그걸 왜 기억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프린트를 해서 자료를 만들어줘도 잃어버리고, 카톡으로 보내도 찾아보지 않고, 구글 공유 프로그램에 정리해둬도 찾아보지 않는다. 스스로 할 의지 없달까...?



사무실에 들어서자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직원들과 눈이 마주쳤다. 일주일 만에 본 거지만 서로 반가운 마음에 유난스럽게 안부를 물었다. 새로 온 에디터를 신경 쓸 겨를 없이 제주도와 사무실을 오가며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새로 온 에디터와 인사를 나눴다. 이름이 뭔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며 친목을 키워나가려는 찰나 대표가 사무실에 등장했다. 간단한 목례 후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평소에는 밝게 인사를 건넬 만도 한데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분위기가 얼어붙고 정적이 찾아왔다. 대표가 찾은 자료가 어딨는지 알려주고 나도 자리에 앉았다. 바로 K에게 카톡이 왔다.



K: 밀크티 사러 카페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대답도 않고 카드를 꺼내 K를 향해 흔들었다. 빠르고, 신나고, 리듬감 있게 휘휘! K가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꾹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아 언니, 하마터면 그 조용한데 웃을 뻔했어요.”


“헤헤. K, 구멍가게 갈 거예요?”


“네, 오늘은 문을 열었어야 하는데.”



구멍가게는 사무실에서 가까운 카페 중 하나다. 원래 더 가까운 카페가 있지만 거기는 커피 메뉴가 전부라 잘 가지 않는다. 그나마 메뉴가 많고 퀄리티도 좋은 구멍가게는 문을 가끔 연다. 여성분 혼자 운영하는 곳인데, 운이 좋아 밀크티를 마셔봤는데 독특한 맛이 났다. 일반 밀크티와 달리 홍차를 주전자에 직접 끓여서 우유맛과 홍차 향이 잘 어우러진다. 달콤하다기보다는 향긋한 밀크티. 카페 앞에서 우리는 잠시 숨을 돌렸다. 내부에는 불이 켜져 있는데, 사장님이 보이지 않는다. 문도 잠겨있다.



“언니, 지지. 더러워요. 여기 번호 적혀있는데 전화드려볼까요?”



애꿎은 문에 이마를 박은 채 '흐엉, 안돼'를 연발하는 나를 K가 슬며시 당겼다. 문과 떨어진 후에야 K의 말에 동의했다. 신호음이 들리기도 전에 사장님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언뜻 들어보니 병원에 잠깐 왔는데 사람이 많아서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고 사정을 설명하시는 것 같았다.



“어떡할까요 언니? 기다릴 수 있으면 비밀번호 알려주신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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