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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ky May 15. 2020

#16 밀크티 대신 군고구마

어린 꼰대가 무섭다

“점심시간도 꽤 남았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전화를 끊은 후 우리는 도어록을 열고 카페에 들어갔다.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카페에는 고소한 빵 굽는 냄새가 났다. 단내가 나는 듯하면서도 은근한 커피 향이 풍겼다. 꼭 공방처럼 크고 동그란 엔틱 테이블에 방금까지 사용한 뜨개질 용품이 널려있고, 작은 오븐은 에그타르트를 굽고 있다. 슬슬 찬 바람이 불어서인지 오래된 기름 난로 위에 놓인 군고구마, 맛있겠다. 사장님이 없는 틈에 가게 여기저기 살펴보는데 K의 전화가 울렸다. 



“언니, 사장님이 기다리는 동안 이 고구마 먹으라고 하시는데 드실래요?”

“앗싸.”



가장 큰 고구마를 골라 테이블에 앉았다. K는 휴지 몇 장을 뜯어 내 앞에 깔았고, 나는 고구마를 반으로 나눴다. 겉이 바싹 마른 고구마의 속은 노랗게 익었다. 껍질 군데군데가 타서 바스러졌다. 손에 겁은 재가 묻어났다. 잠시 K의 얼굴에 재를 묻히는 장난을 구상하다가 착한 사람에겐 할 짓은 아닌 것 같아 미수에 그친 채 고구마 반쪽을 K에게 건넸다.



“새로 온 분은 좀 어때요? 얘기는 좀 해봤어요?”


“저번에 점심 같이 먹으면서 얘기했어요. 이 많은 일을 어떻게 했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말을 끝낸 K가 고구마를 한입 물었다. 막 구운 고구마는 아니라서 입술이 델 정도로 뜨겁지 않았다. 당연한 반응이다. 우리야 내성이 생겨 다른 사람들에게는 평균치 업무량이 여유로운 느낌이지만, 일반 회사에서 일하던 사람에게는 갑작스럽고 부담스러울 테다. 그렇다고 일을 나눠주지 않을 순 없다. 이 회사에 적응하려면 적어도 세 달은 고생한다. 일과 동료에 적응하는 데 한 달, 업무 사이클 익히는 데 한 달, 대표의 성격을 받아들이는 데 한 달 그렇게 세 달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수습기간 세 달이면 적어도 일 년은 참고 견딜 수 있다. 새로 온 분들에게 첫날 꼭 해주는 말 중 하나다. 아무리 힘들어도 딱 세 달만 참으면 그다음부터는 편해질 거라고 조언을 해주지만, 경력자에 나보다 나이도 많은 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필요 없을 것 같아 이번에는 최대한 말조심하기로. 어린 꼰대가 더 무서운 법이다.



“세 달.. 견딜 수 있을까?”


“그래도 경력직인데... 금방 적응하시겠죠!”


“그렇겠지. 왜 이렇게 불안하지...”



이번에는 무슨 기준으로 사람을 뽑았을까. 사실 대표가 사람을 뽑는 기준을 썩 신뢰할 수 없다. 자신과 라이프스타일이 맞다거나 우리 잡지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을 뽑는다. 일을 잘하는지, 일 할 때 어떤 스킬이 있는지, 팀워크를 중요하게 여기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면접을 볼 때마다 답답하다. 한 번은 에디터들과 함께 면접을 봤는데, 오히려 우리의 낯이 뜨거울 정도로 대표의 위엄 따위는 없었다. 나서기 좋아하는 P와 내가 면접자의 포트폴리오를 더 자세히 보고, 업무 스킬을 묻곤 했다. 



껍질을 완전히 벗긴 후 고구마를 계속 먹었다. 음료도 없이 고구마만 꾸역꾸역 먹어서인지 목이 말랐다. 속이 꽉 막혔다. 정수기라도 있으면 물이라도 마실 텐데. 밀크티가 더욱 절실해졌다. K에게 목이 마르다고 찡찡대고 있는데 K와 내 스마트폰이 울렸다. 나는 P에게서, K는 카페 사장님에게서 카톡이 왔다.


P: 왜 안 오냐고 찾음.

초연: 응, 지금 가고 있어.



또, 또, 또 시작이다. 분명 사무실에서 나올 때 잠깐 카페에 갔다 오겠다고 말했는데, 고작 10분도 안 지나서 왜 안 오냐고 다른 직원들을 닦달했다. 점심시간도 안 지났고, 이 동네에서 카페를 가더라도 괜찮은 곳을 가려면 족히 10분은 걸어야 한다. 대표의 시간은 자기중심적으로 흐른다.



“언니, 사장님 아무래도 더 걸릴 것 같다시네요. 그냥 갈까요?”



못내 아쉬운 마음을 접고 고구마 껍질을 휴지에 싸서 버리고, 조심한다고 조심했지만 테이블에 묻은 탄 고구마 껍질을 닦아냈다. 앉았던 의자도 정리하고 얌전히 카페를 나왔다. 문을 닫고 도어록을 다시 잠그려 했는데, 도어록이 작동을 하지 않았다. 고구마만 얻어먹고 가는 것 같아 죄송한데, 도어록이 안 잠기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이거 왜 안 잠겨?!”

“문 닫고 비번 다시 누르면 잠기지 않을까요?”



K의 말대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도어록을 잠갔다. 안 된다. K가 당황해서 이런저런 방법을 강구했지만 어느 것도 통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무식한 방법이 최고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댔어. 내가 해볼게.”



안쪽에서 닫힘 버튼을 누른다. 도어록보다 빠르게 문을 닫는다. 문이 잠긴다. 간단한 방법이다. 순발력을 최대치로 올리면 가능할 것 같았다. 숨을 고르고, 행동에 들어갔다.



손이 통과할 정도만 문을 연 채 버튼을 누른다. 즉시 손을 빼면서 문을 닫는다. 실패. 다시.

버튼을 누른다. 즉시 손을 뺀다. 문을 닫는다. 실패. 다시.

누른다. 뺀다. 닫는다. 실패. 다시

누리고 빼고 닫는다. 실패.


“아! 왜 안돼!!!”



골똘히 고민하던 내가 내놓은 방법이 무척 어이가 없었는지 평소 같으면 벌써 나를 말렸을 K가 정신없이 웃고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벽에 기대서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는데, 마지막 시도에서 내가 소리를 지르자 참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웃었다.



“나는 기계보다 못한 인간이 아니라고!!”


“그만... 그만... 배 아파. 혼자 보기 아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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