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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ky May 21. 2020

#17 P가 화났다

물 경력인가, 신입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마감 시즌이 다가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재택근무가 끝났다. 매일 아침 10시에 출근하며 마감에 박차를 가했다. 종종 번거로운 외부 업무가 끼어들었지만 나름대로 여유롭게 보낸 3주였다. 쉬면서 틈틈이 자료 수집도 했고 원고도 작성해둔 터라 다른 달에 비하면 덜 부담스러웠다. 이대로면 순조롭게 마감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바람이 무색하게 출근한 첫날 사무실 풍경은 가관이었다. 며칠 째 야근 중인 P의 자리에는 더치커피, 핫식스가 잔뜩 쌓여있고 상대적으로 깨끗한 K의 책상에는 파스 한 박스가 모니터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종종 마감이 가까워지면 사무실에는 온갖 냄새가 가득하다. 제때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 자신의 자리에서 컵밥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K, 구부정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는 통에 어깨 근육이 뭉쳐 쑥뜸을 뜨는 P, 비타민 복용하듯 꾸준히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 마시는 S, 고된 두뇌 회전으로 꾸준히 당을 섭취하는 M, 손목과 손가락 마디에 통증이 심해 깁스처럼 파스를 손에 돌돌 말고 있는 나까지 포함하면 가지각색, 다채로운 냄새가 풍긴다. 그나마 P의 쑥뜸 덕분에 냄새가 많이 가셔서 매번 대표의 꾸지람은 피할 수 있다. 에디터들과 부대끼질 않아 사라졌던 마감 감각이, P의 커피와 K의 파스를 보고 살아났다. 



'정신 차리자. 일해야지, 일.'



정상출근 첫날은 지옥이었다. 원고 쓰랴, 교정 보랴 정신없는 P에게 진행상황을 전달받아 디자이너와 상의하고, 내 원고가 끝나는 대로 2교 파일을 넘겨받아 교정교열을 시작했다. 요청 자료가 도착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기에 이미지를 배제하고 교정교열에 돌입했다. 책 정보는 정확하게 표기됐는지, 약물을 정확하게 들어갔는지, 오타가 있는지, 문장이 너무 길어서 주술 호응이 틀리진 않았는지, 같은 문장이 반복되지 않은지, 지난달 원고가 남아있진 않은지, 콘텐츠 목록과 페이지 네이션이 일치하는지, 광고는 정확한 페이지에 들어갔는지 등 문제가 발견되면 디자이너에게 확인하고 교정지에 체크했다. 그렇게 8시간을 봤는데도 교정이 끝나질 않았다. 저녁 7시가 되어서야 맨손체조 겸 자리에서 일어나는 직원들이 눈에 띄었다. 원래 이맘 때면 모두 말수가 급격히 준다. 가끔 출퇴근 길에 서로의 얼굴을 보면 어깨 한 번 토닥이는 것으로 위안 삼는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2교를 완벽하게 보지 못한 채 3교 날이 됐고, 그제야 P는 원고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교정 볼 시간이 생겼다. P는 자신의 원고를 한번 더 읽어볼 틈 없이 교정을 시작했다. 대체로 교정은 1교 이틀, 2교 이틀, 3교 하루, 4교 하루를 할애하고 4교 날 저녁에 최종 인쇄 파일을 추출해 인쇄소에 넘긴다. 그래서 3교와 4교는 에디터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특히 P가 교정을 원활히 보지 못했다면 더욱 예민해지는데, 특히 P가 가장 예민하다. 좀처럼 화내지 않는 사람이지만 표정이나 말투만 살펴봐도 불편한 감정이 금방 티 난다. 그래서 P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내가 더 불안해서 뒷바라지를 자처한다. 대신 욕해주고, 대신 화내 주고, 대신 일정 조율하며 트러블을 최소화하려 노력한다. 그런데, 그날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P의 인성이 손쓸 틈 없이 결국 터져버렸다.



몇 번이고 화가 난 P를 본 적 있는 나조차도 안절부절못할 정도로 심각했다. 언성을 높이지도, 험한 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P의 표정이나 말투가 범상치 않았다. 사실 P는 친한 사람에게도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려니'를 기본 마인드인 사람이라 언짢거나 불편하긴 해도 화를 내지 않는다. 사실은 그래서 상대방을 더 화나게 만든다. 본인이 화를 내지 않는 방법 중에 하나인지는 몰라도 평소에도 말을 예쁘게 할 줄 모른다.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는 더 그렇다.



그때 나는 S와 화면 교정을 하면서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브랜드 이름이 귀여워서 온갖 드립을 치며 웃고 떠드는 중에도 P의 말투에서 다채로운 감정이 느껴져서 입을 다물고 귀 기울였다. 낌새를 차린 S도 순간 입을 다물고 컴퓨터 모니터만 들여다봤다. P와 새로 온 에디터의 대화는 길지 않았지만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이거 아직 이미지 받기로 하셨던 거 아니에요? 언제 보내준대요?”


“모레까지 보내주신다고 했어요.”


“그날은 감리 날인데요?”



정적이 찾아왔다. 막말로 좆됐다. P는 화를 자주 내지 않기 때문에 잘 화내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화가 나면 상대의 말을 듣지 않고 혼자 결론을 내리고 대화의 장을 마련조차 하지 않는다. 



“아, 정말요? 그럼 어떡하죠...?”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면 안 되죠.”



엎친데 덮쳤다. S는 조용히 이어폰을 꽂았다. K와 나는 눈이 마주쳤고, 막내 에디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초조했다. 폭탄의 심지에 불이 붙었고 서서히 타들어가는 듯한 P를 지켜보고 있자니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물론 P가 화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한다. 경력직이라고 들어왔는데 마감 일정도 모르고, 인쇄 전까지 자료를 받아서 전달해야 하는 것도 모르고, 원고가 막내 신입보다 못하다는 얘길 들었던 터라 인내심이 바닥났을 거다. 말 한마디 잘못 보탰다간 안 한 것만도 못한 상황에 놓일 게 뻔했다.


“아, 제가 지금 다시 연락해서 받을게요.”


“아니요. 그 이미지 없이 디자인 다시 해서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거 답 기다릴 시간 없어요.”


K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래도 결론에 이른 것 같아 다행이라고 눈빛으로만 주고받았다.



 그날 나와 P, K는 최대한 퇴근 시간에 맞춰 3교를 끝내고 연남동으로 향했다. 버스정류소에서 나와 K는 다음에는 어떤 주제를 하면 좋을까 고민하며 즐겁게 버스를 기다렸지만 P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P의 행동이 너무도 당연해서 우린 차만 P에게 말 붙이지 못했다. 그날 우리의 선택은 연남동 달빛 부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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