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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ky May 25. 2020

#18 달빛 부엌, 침묵의 뒷담화

 이베리코 철판 스테이크, 일품진로 소맥

이상한 날이었다. 시끌벅적할 줄 알았던 달빛 부엌에 직장인 한 팀이 전부였다. 벅적거렸으면 했다. 시끄러운 공간에서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목청 높여 떠들다 보면 스트레스가 풀릴텐데... 내일 볼 PDF를 프린트하면서 출출하다는 K의 의견을 적극 반응하다가 이곳이 떠올랐다. 가끔 P와 술집을 다니다 K가 좋아할 만한 요리나 분위기인 가게를 발견하면 언제가 되더라도 꼭 한번 K를 데리고 방문하곤 한다. 'K가 좋아할 곳이다' 'K랑 한 번 와야겠네' 같은 말들을 습관처럼 내뱉는다. 그날도 K가 좋아할 것 같은 메뉴를 발견해서 이곳에 꼭 한 번 같이 오자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메뉴를 고심하던 P가 종업원을 불렀다. '저기요' '여기요' '사장님' 같은 지칭 없이 가만히 손을 들어 흔들었다.


“김치수제비랑 아베리코 철판 스테이크 주세요. 술은.... 뭐 마실래?”



P가 오랜 침묵 끝에 입을 뗐다. 단내 나겠는데.



“소주 마실 거야?”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마시고 싶은 거 마셔.”


“선배, 저는 하이볼 마실게요.”


“그럼 나는 우선 일품진로 소맥”


“일품진로 소맥 두 잔이랑, 산토리 하이볼 한 잔 주세요.”



본격적으로 소주를 마시기 전에 먼저 한 잔 마시면 빠르게 술자리 기운을 북돋을 수 있는 소맥이다. 대부분 술집에서는 일품진로를 따로 판매하는데, 이곳은 일품진로 한 잔과 맥주를 섞은 소맥을 판매하고 있어서 이곳에 오면 꼭 한 잔씩 마시고 난 후에 소주를 마신다. 일반 소맥보다 쓰진 않아도 나름 폭탄주이기 때문에 독하다.



“이달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만. 짠!”


 잔에 이슬 물방울이 맺히기도 전에 P와 나는 소맥을 단숨에 들이켰다. K도 그간 시원하게 하이볼을 들이켰다.


“내일만 고생하면 정말 끝난다. 이달도 해내긴 해냈네.”


“고생하셨어요, 선배. 교정 보랴, 원고 쓰랴. 매달 해내는 것도 참 신기해요.”



살짝 데친 브로콜리에 마늘 후레이크, 후추, 소금으로 간한 기본찬이 바닥을 비울 때쯤 이베리코 철판 스테이크가 나왔다. 뜨거운 철판 위에 가지런히 놓인 돼지고기 한 점을 집었다. 입에 쏙 넣고 조금 남은 소맥을 마저 마셨다. P는 안주도 없이 계속 술만 마셨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적절한 주제를 찾지 못하고 젓가락만 허공에 방황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섣불리 얘길 꺼냈다간 괜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한 명이라도 더 늘어서 저번 달보다는 덜 힘들었던 것 같아요.”



K의 말에 P와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K는 착하다. 괜한 얘기 꺼내지 말자.



“그건 그렇지. 그래도 일정을 전혀 몰랐단 건 좀 심하더라...”



P가 먼저 K의 말에 답했다. 우리 잡지의 중심을 잡는 기사인만큼 허투루 할 수 없다. 볼륨도 가장 많고 사진 한 장, 원고 한 문단 바뀌는 것만으로도 디자이너가 골치를 썩어야 한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일정을 모른다는 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일정을 지켜야 하는 잡지사에서 일정도 모르고 일을 하는 에디터가 어딨단 말인가. 거기다가 교정기간에는 원고를 다 써서 딱히 할 일이 없다 하더라도 일을 버거워하는 교정자나 에디터가 있다면 눈치껏 뭐라도 도와주겠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계속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모습은 영 신뢰를 갖기가 힘들었다. 경력자라고 했는데, 왜 경력자 같지 않은지 의아했다.



“그건 그래요. 제 자리에서는 잘 안 보이는데, 대표님이 찾으면 항상 자리에 없더라고요. 한 번 나가면 잘 들어오지도 않고.”


“원고 퀄리티도 사실 경력자가 맞나 싶어요. 교정 보면서 좀 놀랐어. 우리 막내가 더 잘 쓰더라.”



K와 P에게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얘기지만, 솔직히 자존심이 상했다. 경력자면 나보다 더 잘으니까 당연히 잡지에서 가장 중요한 기사의 중심을 잡고 이끌어주면 좋겠다고, 그러니까 내가 그 기사를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막내가 더 잘 쓴다는 얘길 듣고 욱했다.



“소주 한 병 시킬까? 한라산?”


“좋지.”


“드디어 달리시는 건가요.”



달려야지. 속만 끓였다. 딱히 재밌는 주제로 오가진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밑도 끝도 없이 처참해질 것 같았다. 술이나 마시자.



“술이나 마셔야지. 에휴.”



입사하고 한 번도 메인 기사를 맡아본 적 없다. 처음 입사했을 때는 외부 교정교열자가 내 원고를 가지고 별별 소리를 다 해서 대표가 내게 한 마디 한 적 있다. 그 교정교열자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선배 에디터들이 잘 썼다고 칭찬을 했어도 결국 돌아오는 그 사람의 평은 좋지 않았다. 첫 1년은 원고 쓰는 방법과 코너 기획 감각을 키우는 데 열심히 했고 그다음 2년은 그간 익힌 기술을 적용하는 데 힘썼다. 나름대로 에디터로 부끄럽지 않을 만큼 코너 기획력이나 원고 작성력을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매번 새로운 에디터가 오면 중요한 기사를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다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이런저런 일에 뛰어들었다. 콘텐츠 마케팅이나 단행본 기획 등 닥치는 대로 했다. 그런데 들어온 경력자가, 속된 말로 굴러온 돌이 흙탕물을 만드는 꼴을 지켜보고 있자니 미칠 것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정답이니 우선은, 가만히 P와 K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소주를 P의 잔과 내 잔에 따랐다.



“우리 국제도서전 했을 때, 정말 재밌었는데.”



드디어 주제를 찾았다. 즐거운 얘길 해야 술맛이 좋을 테니 재밌었던 기억을 들췄다.


“그때 진짜 많이 팔았지. 나는 마감이라 못 갔는데, K는 갔었죠?”


“네. 사람 엄청 많고. 좋은 자리였어요. 우리 진짜 기계 같이 잡지 소개하는 대사 줄줄 외우고. 우리가 팔면 팀장님이 계산해주시고 호흡이 진짜 좋았어요.”



K의 말이 끝나자마자 P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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