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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집 호박에 말뚝을 박아도

by 김지영

퇴직을 앞두고 있을 무렵 고향에 살고 있는 죽마고우 삼식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잘 지내고 있는 겨?”
“근디 말여, 퇴직하면 뭐 할겨?”
“그러게 말여, 아직 뭘 할지 모르겠네, 좀 쉬다가 생각해 봐야것구먼!
”머시매는 절대루 집에서 있으면 안되는거여“
”남의 집 호박에다 말뚝을 박더라도 부지런히 돌아댕겨야 하는거여!“
친구의 말이 맞았다.


36년간 교직에 있다가 정년퇴직을 하고 몇 달 집에 있다 보니, 좀이 쑤셔서 죽을 맛이었다. 허구한 날 새벽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종을 치면 교실에 들어가고 종을 치면 급식을 먹고, 종을 치면 퇴근을 했다. 종이 없으면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이었다.

일 년 365일 연초에 주어진 시간표에 따라 일분일초도 어긋남 없이 살다가,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고 자고 싶으면 자는 생활을 몇 달 동안 했다. 그런 생활이 얼마 동안은 자유스럽고 좋았다.

그런데 한 두 달 지나고 나니 때가 돼도 배가 안 고프고 때가 돼도 잠이 오질 않았다. 얼굴은 더욱 초췌해지고 하루하루가 재미가 없고, 마음마저도 울적했다.


그러던 차에 동네 어귀에 플래카드가 걸렸는데, 통장을 모집한다는 광고였다. 부랴부랴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러 갔다.

주민센터 동장실에서 면접을 보는데 동장을 비롯해서 통장 회장 등 여섯 명이 돌아가며 나에게 질문을 하더니, 통장 일을 잘하시겠다며, 며칠 후 통장 월례회 때 임명장을 수여하겠다고 한다.

나는 신이 나서 주민센터를 나오자마자 철물점에 가서 쓰레박이와 비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당장 내일부터 마을 곳곳을 돌며 쓰레기를 줍고 청소를 해야지’


근데 통장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적십자회비 고지서가 나오면 일일이 집집마다 다니며 전달해야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발간하는 회지도 일일이 다니며 우체통에 넣어야 했다.

어렵게 사시는 어른들을 파악해서 그분들께 반찬을 배달해 주기도 하는데 반찬을 들고 집에 들어서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당신이 살아오신 말씀을 하시는데, 도중에 말씀을 끊을 수가 없다.

장마가 지거나 하면 마을 주민들한테서 전화가 빗발치고, 어느 집 앞에 쓰레기가 방치되었다느니 개 짖는 소리가 크니 주인한테 말을 해달라느니 이웃집 나뭇가지가 자기네 집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고 그걸 잘라달라느니, 통장 일이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 와중에 한 달에 한 번씩 이른 새벽에 나가 마을 청소를 하고, 통장을 하기 전에는 눈에 안 띄던 쓰레기들이 통장을 하고부터는 마을 곳곳이 온통 쓰레기투성이다.

결국 임기 2년을 마치고 더 이상 유임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는 성당에 가서 할머니를 대상으로 야학을 했다. 몇 달 동안은 재밌었다. 할머니 학생들이 교탁 위에 떡과 음료수를 올려놓으면 우선 그것부터 먹은 후 수업을 시작했다. 온종일 식당에서, 요양보호사로 일을 하고 밤늦은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서 수업을 듣는 나이 드신 학생들에게 시를 말하고, 때로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수업을 하다 보면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나 여름이 다가오자 학생들이 꾸벅꾸벅 졸더니 어느 날 여든이 넘은 반장 할머니가 결석을 했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결석을 했다.

나중에 사연을 알아보니 학생들끼리 다툼이 있었는데, 한 학생이 나에게 반말 비슷하게 말을 하자, 선생님께 그러면 되냐고 언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 후 소풍도 가고, 졸업생들과는 1박2일 수학여행도 가고, 또 백일장을 개최해서 상도 주고 교지도 만들고 앨범도 만들고 여느 학교와 다를 바 없이 학교 일정이 진행되었다.

그러기를 일 년, 보람은 있었으나, 밤늦게 먼 길을 오가는 것이 힘들어서, 그 일도 더 이상 하지 못하고 사직서를 냈다.

그리고 시작한 일이 코로나 방역이다. 퇴직 후 코로나가 유행하더니 학교마다 방역 알바를 구하는 공고문이 떴다.

운 좋게도 서울에 있는 공립학교에 코로나 방역 알바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코로나 방역이라는 것이 학생들이 등교할 때 열을 재고 학교 곳곳을 돌며 소독을 하는 일이었다.

소독을 하다 보니 화장실에 들어가서 변기를 닦기도 하고, 복도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등, 청소부 아주머니들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했다. 그러기를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도록 코로나는 멈추지 않고, 내 일자리도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학교에 교육감이 오신다고 이른 아침부터 행정실 직원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청소를 하고 난리 법석을 떨었다.

점심때가 되었을 무렵, TV에서 자주 보던 교육감님이 교문으로 들어서고 수행원들과 기자들이 대동했다.

나는 평소처럼 방문객들에게 열 체크를 하려고 온도계를 들고 서 있는데, 교육감님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하는 말씀이


”어디서 많이 뵌 분이신데,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그러자 옆에 서 있던 교장선생님이
“방역입니다.“


그 순간(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교육감님의 팔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고는 그의 귀에다 대고는
”정년퇴직을 하고 방역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육감님의 열렬한 팬입니다.“
그러자 교육감님이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참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고 교장선생님은 교육감님을 교장실로 모시고 가서 브리핑을 하고, 나는 퇴근을 하는 중인데, 교장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교육감님이 찾으시는데 어디 계세요?”


다음 날, 교문에서 아이들 열 체크를 하고 있는데, 여느 때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교장선생님이 나에게 부리나케 오더니
“선생님, 교육감님을 어떻게 아세요?”
그러기에
“아~예, 소싯적에 좀 알고 지냈습니다.”(사실 나는 그날 교육감님을 처음 봤다.)


그로부터 며칠 후, 교장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3학년 국어 수업을 맡아 달라고 한다.
하루는 걸레를 들고 화장실 변기를 닦고, 또 하루는 근엄한 모습으로 교실에 들어가서 수업을 하다 보니, 나를 향하는 아이들의 눈빛이 이상하다.


아흔이 넘으신 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다.
“집에서 노는 게 더 힘든 거여, 할 수 있을 때까지 일을 햐!”
(예, 아부지, 남의 집 호박에 말뚝을 박더라도 돌아댕길거구먼유.)
나는 오늘도 여섯통의 이력서를 썼다.

학력을 낮추면 취직이 잘된다고해서 이력서엔 중졸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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