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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프리카 Apr 28. 2021

불완전의 미학

어른이의 시각으로 ‘벼랑 위의 포뇨’ 다시 보기

  리나라에 아기 공룡 둘리가 있다면 옆 나라 일본에는 아기 물고기 포뇨가 있다. ‘벼랑 위의 포뇨’는 ‘이웃집 토토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같은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의 대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이다. 2008년 개봉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가족과 함께 영화관에서 관람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13년이 지나 반쪽 짜리 어른이 된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영화를 찾아보고는 하는데 그 순간만큼은 언제나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로 돌아가 설렘으로 부푼 마음을 안고 화면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은 장면 장면마다 배치된 요소들을 이리저리 조립하고 내포된 의미를 찾으며 어린 시절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영화에 집중하곤 한다.


  이를테면 지금까지는 줄거리를 따라가기 바빴지만, 이제는 스토리가 아닌 제목에 먼저 눈길이 간다. 포뇨는 왜 ‘벼랑 위’에 있을까? 벼랑을 머릿속으로 이미지화했을 때 떠오르는 감정들은 대게 어둡고,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 “우리 집은 폭풍 속의 등대나 마찬가지야. 지금 캄캄한 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빛을 보고 희망을 가지니까. 그래서 누군가는 여기 있어야 해.” 작중 소스케의 집은 벼랑 위에 있고 어머니의 대사를 통해 벼랑은 곧 등대를 지칭하며 이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밝혀 길을 잃은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벼랑은 영화 속에서 무엇보다도 밝고 긍정적이며 따뜻한 존재이다. 조금 더 확장하여 생각해보면 소스케와 가족들에게 벼랑은 언제든 돌아가 쉴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다. 그리고 이는 포뇨에게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되기 이전까지 바다에서 살았던 포뇨가 육지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나 또 다른 보금자리를 찾게 된 것이다. 또한, 벼랑 위에서는 언제든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다. 육지와 바다의 두 공간이 벼랑을 통해 연결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바다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인간의 모습이 된 포뇨가 소스케를 만나기 위해 거대한 파도와 함께 달려오는 장면에서 소스케는 파도를 물고기로 인식했다. 즉, 아이들의 시선, 아니 인간의 시점으로 바라봤을 때 바다는 살아 숨 쉬는 놀이터, 일상 속의 배움터와 같은 존재다. 나는 가끔 물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스스로 물속에 빠지고 싶은 이유 없는 충동에 사로잡히곤 하는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스스로 깨닫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늘 바다를 갈망하고 그 마음을 새긴 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귀여운 동생들, 아름다운 바다 생명체에게 둘러싸여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포뇨가 육지를 갈망한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주목하고 싶은 점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바다의 삶을 선택한 아버지와 달리 포뇨는 인간으로서 육지에서 살고자 했다. 왜? 나는 이 커다란 물음표에 대한 해답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포뇨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난 ‘인간’ 소스케가 주는 한없이 따뜻한 애정을 느꼈고 그의 마음은 마지막까지 변치 않아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인간이 된다. 사실 포뇨가 인간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그저 소스케의 곁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강렬한 욕망은 그 자체로 나아갈 원동력이 되어 두 다리가 된다. 어린 시절에는 포뇨에게 ‘다리’가 생기는 장면에서 디즈니 영화 속 인어공주처럼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기대했는데 겨우 발가락 세 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라서 조금 실망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소스케에게 달려갈 수만 있다면 포뇨에게 다리의 형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 같다. 물고기 모습,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 인간이 아닌 포뇨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소스케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두 사람이 보여주는 사랑과 신뢰는 소중한 사람을 대할 때의 내 모습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한다. 무엇이든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은 없다. 나도 이들처럼 사랑하고 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365일 중에서 360일을 만화와 함께하는 나에게 벼랑 위의 포뇨는 많은 애니메이션 영화 중에서도 유독 애틋하게 느껴진다. 영화는 곧 어린 시절 추억의 한 페이지고 등장인물들의 사랑스러운 행동과 마음이 화면을 넘어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논외의 이야기지만, ‘어른인’ 내가 만화를 열심히 소비하는 이유는 우리는 모두 어릴 때부터 마음속에 간직해 온 추억의 만화가 하나쯤 존재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만화를 ‘아이들의 전유물’로 취급하며 멀리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다. 10년, 20년이 지나도 추억은 아름다운 상태로 유지된다. ‘흑역사’와 같은 부끄러운 추억들도 차츰 나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만화도 마찬가지다. 애써 부정하거나 멀찍이 떨어뜨려 놓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을 위한 만화? 애초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은 어른들의 역할이다. 아이들을 위한 만화가 존재한다면 반대로 어른을 위한 만화도 마땅히 필요하다. 쏟아지는 영상 매체의 늪에서 만화가 가진 가치가 많은 사람에게 전파되어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이 더욱 활발해지기를 바라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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