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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프리카 Apr 28. 2021

진실을 마주하려는 용기

그 누구도 남을 구속하거나 그에게 명령할 수는 없지

  모노노케는 2006년 방영된 옴니버스 형식의 애니메이션 ‘괴 아야카시’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화묘(化貓)’의 긍정적인 반응에 힘입어 제작되었다. 5가지 에피소드가 총 13회에 걸쳐 방영되었는데 작품의 설정상 주연 캐릭터의 디자인과 전반적인 분위기가 전통 일본풍인 데다 연출과 색채가 독특하여 호불호가 극명하게 구별된다. 개인적으로는 각 에피소드가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고 특히 ‘옛날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핍박받았던 여성들의 삶’을 다룸으로써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 일본의 신화와 민담 속 흥미롭고 다양한 요괴들의 등장, 독특하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 연출적인 부분에서 한 번쯤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에피소드를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았던 ‘화묘(化貓)’편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제목의 한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본 이야기에는 고양이가 등장한다. 일본어로 ‘바케네코’라고 발음하는 화묘는 일본 민속 설화에 등장하는 고양이 요괴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사카이 가문은 부엌 군데군데 쥐덫이 놓여 있을 정도로 쥐가 들끓지만, 어째서인지 고양이를 키우려 하지 않는다. 한편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게 된 사카이 가문의 아가씨 마오는 혼삿날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주인공 약장수에 의해 그녀가 모노노케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녀의 죽음에 얽힌 사카이 가문의 비밀-25년 전, 혼례길을 떠나던 여인 타마키를 마오의 할아버지가 납치하여 지하에 감금하고 폭행과 유린을 일삼았다.-이 드러나고 원한에 사로잡혀 있던 모노노케는 약장수의 손에 정화된다.


  ‘모노노케’란 원귀로도 해석되는데 작품 내에서는 사람을 질병처럼 저주하는 원한, 증오, 슬픔을 뜻한다. '모노'는 날뛰는 신, '케'는 질병으로 인간의 격렬한 정념과 요괴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을 모노노케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노노케와 같은 괴물이 만들어지는 근원에 인간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화묘편을 인상 깊게 감상했던 이유도 바로 이 부분을 극대화하여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건의 내막인 마오의 할아버지는 과거의 잘못을 철저하게 왜곡, 미화하여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자진해서’와 같은 표현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린 사카이 가문의 일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죄보다 타인의 책임을 강조하며 문제의 본질, 진실을 바라보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왜곡된 기억이 진실로 뒤바뀌는 장면의 연출은 다시 볼 때마다 인상 깊었다. 인물의 입을 빌리지 않고 글자로 대사를 표현한 것은 말이란 언제나, 몇 번이고 진실을 덮을 수 있는 가장 편리한 수단이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오랜 시간 동안 감춰져 있던 죄악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은 무척 두려운 일이고 가능하다면 최선을 다해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나 또한 잘못을 똑바로 바라봐야 하는 상황에서 작아지는 나의 모습을 몇 번이나 마주했다. 작품에서는 풀리지 않은 원한, 증오, 슬픔이 모노노케가 되었지만, 현실에서 죄를 짓고 속죄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따라서 잘못을 은폐하고 책임 전가하는 모습은 스스로 괴물이 되는 것을 자처하는 행위나 다름없는 것이다.


  관계에 있어 적응성이란 타인과 나의 조화이자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게 종속된다는 것, 그 속에서 자유를 잃고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타마키가 겪었을 고통과 그녀의 죽음에 통감하고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 없는 삐뚤어진 욕망에 의한 결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원한은 모노노케와 함께 정화되었으나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친 인물은 한 명도 없었고 결국 모두가 최악의 시나리오를 맞이했다. 이전까지는 타마키의 마지막이 말 그대로 개죽음이 아닌가 안타깝기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약장수에 의해 정화된 그녀의 영혼은 더 이상 누군가를 향한 원한, 증오, 슬픔에 사로잡히지 않은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하는 것 같다. 강자와 약자는 모든 상황에서 존재하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위치에 있든 내가 ‘나’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강자 혹은 약자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은 나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겉을 둘러싸고 있는 일부분에 집착하는 순간 그 욕망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점차 괴물이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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