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예전에 봤던 다큐멘터리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유서 한 장을 서랍에 넣어두고 출동하던 소방관의 모습이었다. 빛이 있는 자리에 그림자가 생기듯 탄생이 있으면 죽음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불쑥 찾아올지 모르는 불청객을 어렴풋이 생각하다 또 잊어버린다. 언젠가 그 날이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막상 상상하려고 하면 아득하게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치 영어 단어장을 외우면서 이 책을 마스터하면 언젠가는 원어민처럼 말할 수 있을 거야! 하고 막연한 기대감에 부푸는 것처럼 말이다.
'If anything happens I love you(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은 총기 사고로 갑작스럽게 딸을 잃은 부모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2분가량의 짧은 애니메이션 한 편으로 나는 주말의 여유에 젖어있던 나태한 인간에서 죽음에 대해 곱씹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전까지 죽음이란 누군가의 존재 자체가 사라져 눈으로 볼 수 없고 이승과 저승은 맞닿을 수 없기에 망자와 생자가 영원히 단절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득 '단절'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적절한가에 대해 의문점이 생겼다. 오히려 다시 만날 수 없기에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부모는 딸을 잃은 현실을 실감하며 슬픔에 고이고 시간은 흐른다. 비난의 화살은 서로에게 항하며 결국 관계의 균열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긴 침묵을 깬 것은 축구공 하나였다. 굴러간 공은 아이의 방에 있던 LP플레이어를 작동시키고 노래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선 부모는 자신의 슬픔에 가려져 있던 상대방의 슬픔을 마주하고 가족이 함께 했던 추억을 회상한다. 그 속에서 보이는 것들이 후회가 되었건 슬픔이 되었든 간에 이 찰나의 순간만큼은 온통 상대방으로 가득해진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떠난 사람을 직접 마주할 수는 없지만, 추억 속에서 우리 곁에 있는 그들은 선명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영원히 기억된다.
작품에서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부모와 아이의 모습을 한 그림자가 등장하는데 처음에는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모의 내면을 투영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슬픔에 갇혀 점차 피폐해지는 부모에게 여전히 그들의 삶이 지속되고 있음을 일깨워주기 위해 노력하고 그들이 외면하고 있었던 주위를 둘러볼 용기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잔인한 일이지만, 생명이 있는 사람에게는 아직 살아가야 하는 나날들이 존재하고 살기 위해서는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나면 언제나 방황의 시간이 한 세트처럼 딸려온다. 뾰족한 감정들이 내면에서 뒤죽박죽 엉켜 상처를 만든다. 이전까지는 이러한 불안 상태를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긴 시간을 들여 천천히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다른 사람과 상황을 공유하고 가능한 한 빨리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최선책인 것 같다.
흔히 죽음으로 인한 육신의 소멸보다도 타인의 기억에서 '나'라는 존재가 지워지는 과정들이 더욱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기억의 저장소에는 한계가 있으니 이 또한 죽음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따금씩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자기 모습에 혐오감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나는 괴로움을 느끼는 것 또한 남겨진 사람들의 그리움의 일부분이고 이것에서 기인한 모든 행위들이 생자와 망자 모두에게 죽음을 넘어선 삶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괴로워하면서 한번 더 떠올릴 수 있고 그렇게 떠난 이들을 추모하며 기억하고 그 빈자리를 보며 내게 주어진 오늘을 반성할 수 있다. 어차피 개인의 인생에서 어떻게 살아야 옳다고 하는 가이드라인은 없고 정답을 찾는 여정이 스스로의 정답을 찾는 여정은 실전이기 때문에 완벽함이 없는 험난함의 연속이다. 가끔 길을 잃거나 모든 것이 지치고 버겁게 느껴지는 날에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믿으며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루를 잘 마무리하는 것부터 연습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