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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오만

by 시간 끝에서 온 빛

인류역사는 오래전부터 늘 호전적이었다. 복잡한 곳에 환장하고 개개인의 차이에 환장한다. 그리고 난 꽤나 호전적인 성격이다. 내 성격이 호전적이라 나도 피를 많이 봤기때문에 그리 좋아하지않는다.

좋아하지않는다랄까 끔찍하게 싫어한다. 호전적인 성격은 언제나 나를 죽이려들기때문이다.

나의 호전성은 전쟁을 닮았고 혐오를 닮아있다.

나의 정체가 호전성 그 자체라는 말이 아니다. 진정한 나는 모두가 그러하듯이 훨씬 거룩한 존재겠지만 아직 문을 열지못한 어떤 부분이 남아있다. 이 호전성에는 무언가를 결코 용서치않겠다!하는 나의 다짐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이 호전성을 잠재워야했다.

잘 다루지못하면 나도 남들도 피를 보기때문이다.

평소에는 너그러운 편이지만( 내가 나를 너그럽다고 표현하는 것도 이상해보일지라도 너그러운 편은 맞다.)

가만히 있는 나를 건드렸다가는 묵사발 날줄 알아라는

메세지를 늘 주는 호전성이 있는데 이게 상당히 파괴적이기때문이다.


나는 왜 그런가?를 알고싶을 때 사용하는 방식이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는 mbti이다.

고전 점성술이나 사주나 자미두수 숙요점 운명수 등등등 별에 별 인간을 분석할 수단을 좋아하는 나의 강박성에게 mbti란 끌리는 분석방법은 아닐정도로 정확도는 현저히 떨어지는 수단이지만 그것보다 더 복잡한 온갖방법으로 인간을 분석해봤자 영적으로 진보되는 일은 단 1도 없다. 인간분석법은 그렇기에 재미를 봤으면 된거다. 인간분석은 놀이기구일뿐이지 영적 진보도구는 아니다.


내가 영적인 진보에 남들보다 관심이 많은 이유는

내가 그러기로 작정하고 태어났기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영적인 진보란 내게 남아있는 많은 죄책감들을 내게서 지우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치유의 행위는 내가 하는 영역이 아니다. 다맡겨버리는 것이다. 그때 치유가 발생한다.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영적인 진보에 왜 관심이 없지?라는 생각이 강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건 개개인의 문제라 강요할 수는 없지만 빨리 털어내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기때문이다. 죄책감을 내게서 덜어낸만큼 내가 행복해지기때문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을 보고서 인간들은 그리고 나는 무기력함과 분노를 느끼고는 한다. 내가 그들을 볼 때 나쁜놈들과 전쟁에 희생당하는 선량한 시민의 구도로만 본다면 나도 그 사람들도 세상의 희생자밖에 되는것말고는 없다.


무기력은 큰 세상과 작은 나라는 개개인 개체가 있을 때 내가 세상의 희생자이고 남들도 희생자라고 여길때 생기는 부산물이다. 내가 몸안에 있고 저기 죽어가는 사람들이 몸안에 있다고 본다면 무기력할뿐이다. 답이 없는 곳에서 답을 찾는 것의 무한 반복일뿐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은 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만들어낸 일도 아니다. 이때 세상이 내게서 태어났다는 생각이 어찌 오만함일 수 있을까?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이다.

원인은 모두 내게 있다고 보는 것이 겸손이다. 자책이랑은 전혀 다른 말이다. 자책할 필요가 없다. 자책은 남탓이랑 같은 죄책감이라는 뜻이라 해결책이 될 수가 없다.


나도 그들도 그것에 관련된 복잡한 여러 국가들도 지구도 희생자들도 여러 쓸데없는 생각들도 고민도 번뇌도 피흘림도 눈물도 공포도 모두 그여태 봐온 빛나는 빛보다 더 찬란히 빛나는 빛속에 끊임없이 맡기도록하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죽을 수 없는 존재라면 그들도 몸안에 있는 나약한 개체들이 아니다. 나는 몸속에 있는 존재가 아니므로 죽음과는 관련이 하나도 없다. 나는 마음안에 몸이 있으므로 그들 또한 몸이 아니다. 그러니 난 죽지않고 그들고 죽지않는다.

죽음이란 환상에 불과하기때문이다.

그것을 완전히 알지못할 때 고통이 따르는 것이고 그것을 완전히 알게 될때까지 나는 포기하지않으리라.


이 이야기는 끊어진 사슬에 붙잡혀있을 필요가 없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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