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공부를 너무 많이 할까봐 걱정하는 편

더 잘 하고, 또 이기고 싶어해요

by 스토리캐처

이제야 제대로

학부모 시작인양


고등학교 지망 순위라는 것에 대해 아이와 드문 드문 논의를 하고 드디어 어젯밤 최종 지망 순위를 정해 볼펜을 들고 하나 하나 조심스레 적었어요. 이게 뭐라고 떨리나 싶지만 나름 경건한 마음으로 적었는데, 글씨 흘려썼다고 아이에게 한 소리 들었어요.


저희 집 분위기는 일단 아이가 알아서 고민과 판단을 하고, 결정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엄마 아빠가 곁에서 아이가 하는 이야기를 흘려듣는 편이에요. '내 말을 잘 들은 게 맞냐'고 저에게 되묻는 빈도가 요즘 부쩍 늘었어요. 저희가 학교 다닌지 꽤 오래되서 그렇겠지만, 어느 날은 요즘 시대에 안 맞는 말을 한다며 '학교에서 나이 든 어느 선생님의 말'처럼 한다고 답답해 하더라구요.


우리는 태어나 살아온 세대가 전혀 다르고, 어느 덧 굽이 굽이 삶의 변곡점을 지나서 반추한 기억이나 미화된 추억에서 길어올린 '지금 이 시기 이 시절 특유의 바이브에 안 맞는 학습 기억'이나 라떼마냥 하나씩 꺼내다보니 나이 든 옛날 사람 취급 받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라 듣는 쪽에서 급 발끈 입이 툭 튀어나와서 볼멘 소리하면 가만히 듣고 있어요. 아예 남이었으면 만날 일도 없는 뉴 제너레이션의 피드백을 이렇게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받을 기회는 귀하니까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라고' 아이가 조심스레 가이드 할 때도 있는데, 어디 다른 곳 가서 듣는 아이 형편, 나이와 사람 상황에 안 맞는 말 조심 단단히 하라고 알려주는 거겠거니 해요.


대체로 등교 거리에 맞게 배정되는 중학교와 달리 첫 고등학교 지망을 앞두고 16세 아이는 내적 혼란이 많더라구요. 당연히 자신도 '공부를 되게 잘 하는 아이들이 주로 많이 간다'는 어느 고등학교에 가고 싶지만, 가서 '중간' 하기도 벅찰까봐 오래 고민하더라고요. 저는 고등학교 다닐 때 공부 잘 하는 주변 친구들이 싹 다 이과 가길래 문과 말고 이과로 냉큼 따라 간지라 그 마음도 십분 이해됐어요.


저는 여기에다 마음 무거운 부담을 얹어 줄 생각은 없어서 제가 보는 시점과 관점에서 '자기 자신에게 이로운 선택'에 대해 저만의 이야기을 찬찬히 들려주며 대화를 나눴어요.


'공부를 누가 굳이 하라고 안해도 내적 동기부여로 진짜 미치게 잘 해버리는 10%는 따로 있다'는 말도 곁들여 가며

'우리는 그런 사람은 아니지 않니?' 라고 말하니 끄덕 끄덕 아이도 동의를 해요. 마음 편히 웃고 노는게 제일 좋은 뽀로로과 종족이고, 그게 꼭 틀린 건 아니니까요.


이 시대에 그 길만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으니 성적에 대해 너의 인생에서 대단히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만큼만 한다 생각하라고,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게임을 알아서 잘 하는 네가 참 자랑스럽고, 너만의 인생을 그렇게 살면 되는 거라고, 체력이 약하고 지치는 날에도 그렇게 학교를 포기하지 않고, 학원을 무리해서라도 계속 다니려는 모습이 안쓰럽고 또 대견하고 놀라울 뿐이라고, 사실은 크게 도움도 안 되는 말을 했죠. 해결은 안 되지만 이 말을 듣고 대답하는 아이 표정은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아요. 결국 '내가 선택하고 결정해야하는 것'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고, 확신이 없는 상태로 정답도 모르겠어서 갈 길을 정하지 못해 마음 복잡해서 불안하고, 그 때 막 올라오는 불같은 어지러움은 이런 객관적인 거리두기식 대화 속에 잠시나마 차분해지는 것이죠. 다만 일시적일 뿐, 내면의 지층이 충돌하고 흔들리는 마음은 사는 한 계속되고 결코 없어지지는 않지만요. 안정적인 기분 그런 순간은 저에게는 단 한 순간도 없었기에 '사는 한 흔들리는 건 기본값'이라는 생각을 해요.


공부가 쉽다는 건 지금은 안하는 사람들의 말이고, 지속적인 경쟁 환경에서 과감히 눈 감고 포기하지 않는 한 '스스로 못하는 것만 되새김질 하지 않는 게' 더 신기한 것이죠. 아이 스트레스가 티 안 나게 많더라구요. 어느 지친 날에는 '나는 별로 잘 하는 게 없다'고 축 쳐진 목소리로 말할 때가 가끔 있어요.


태도가 보기 좋고, 나름대로 성실하고 또 당연히 이기고 싶으니까 공부도 되게 잘 하고 싶어하는데, 체력이 약해서 시험 직전에 바짝 새벽 3시까지만 시험공부하고 자고, 그래도 시험볼 때 실수해서 원하는 점수가 안 나오는 날도 있고 그렇게 살지만, 그 모든 모습이 제게는 참 멋진 인생으로 와닿습니다.


반드시 모든 문제를 다 맞아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마음 편하면 그 나름대로 악착같은 면이 강점이겠지만, 강박증 불안증으로 스스로 혹사시키는 것도 있어요. 반려인이 그렇게 늘 밤을 새서 공부를 했다고, 믹스커피를 1리터를 만들어서 그걸 먹으면서 했다는데, 스스로 1등의 왕관을 유지하려면 어쩔 도리가 없고, '시험 전 날인데 잠이 오냐?'이런 소리가 나오는 거겠죠.


각자 자신의 성질대로 취향대로 공부도 내 기준 적당히는 자유롭게 정해서, 물 흐르듯이 하면 그 게 바로 달라서 아름다운 '진짜 나만의 인생'이라고 봐요.


아이가 자기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듣고, 앞으로 대학진학을 한다면 어느 과를 갈지 정하고 공부를 해나가면 되니까, 힘들다고 말할 때 안아주고, 어디가서 어리광 부릴 수도 없으니 애쓰고 있다고 엉덩이 토닥토닥 두드려주며 격려하는 것 외에는 어떤 제시를 하는 건 저와 맞지 않아요.


제가 아이에게 이렇게 물었어요.

'내가 다른 엄마 아빠들처럼 너에게 많이 관심을 가지고 이 것 저 것 정해주고, 이야기 해 줬으면 좋겠어?'


'간섭과 참견, 청하지 않은 조언, 위계, 명령, 순종, 무조건 무비판 수용, 항복, 대안없음, 선택권 없음, 나이만으로 어린 아이 취급'하는 것을 저는 인생 전반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자유 추구자'라서 이런 저의 소신에 비추어 아이와 자주 동등한 인격체로 대화를 나눠요.


엄마는 엄마의 역할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고, 아이의 앞 날을 위해 정보 찾느라 바쁜 것도 자신의 선택이고, 여긴 한국이니까 또 남들이 하니까 덩달아 불안한 마음 상태로 내 의지에 반하게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게 본인이 편하면 혹은 집안의 가풍이면 그렇게 하는 거고, 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아이에게는 나도 처음 겪는 '지금 이 순간 나의 삶'을 잘 살아내느라 부지런히 바쁘고 나름의 걱정과 과업과 고민을 해결하는 중이니까 '너에게 나의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달라'고 했어요.


파트너십 가족, 각자의 인생을 부단히 잘 살아내는데 힘겨울테니 사랑으로 서로 안아주고,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 가까이에서 손 내밀어 주고 잡아줄 수 있는 동지그룹이 제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스스로 판단하며 결정하고 선택하는 건, 아이 인생에 누군가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서 원치 않는 결과에 원망하는 대신 조금 멀리 돌고 돌아 가더라도 자립하고 독립하며 단단한 내면을 쌓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봐요. 저도 여태껏 그렇게 살아오고 있는 중이거든요. 힘듦에 대해 누구 탓을 하기보다는, 인생 여기까지 오는데 도움을 준 많은 고마운 사람들과 아프게 큰 배움을 던져 준 소수의 사람이 있을 뿐 그 누구도 내내 끝없이 원망하고 앉아 있거나 못해준 것을 하릴없이 세고 있지 않아요. 고마운 인연은 기적인듯 감사히 이어가고 별로인 모습을 보면 타산지석으로 삼고 제 갈 길 가면 그만이에요.


아이가 신중한 편이라 나중에 전공을 정할 때도 속전속결은 아니겠지만, 정보를 수집해서 목표를 정한 후 성실하게 자기만의 페이스로 부단히 해 나갈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게임도 그렇게 잘 하니까, 지금처럼 컨디션 관리만 잘 하도록 그 정도만 도와주면 될 것 같아요.


저는 제 앞 길에 대해 요즘 굉장히 다양하게 기존에 가보지 않은 길을 여러모로 생각하고 있어서, 제 코가 석자, 갈 길이 구만리거든요. 어찌보면 다양한 길 위에 서서 나아갈 방향을 고를 자유가 있는 직업인에 비해 '학생'이라는 아이의 현 직업은 비교적 선택지가 단순하죠.


저도 그렇고 아이도 그렇지만, 남이 하라고 시키면 하기 싫어하는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요. 무엇이든 스스로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하고 싶은 것을 시간을 정해서 집중하고, 나름대로 최선을 쏟아 집중한 뒤 결과를 수용하는 것, 그리고 다음에는 '내가 아는 것을 실수로 틀리지 않도록 주의하기/ 더 나은 방법을 찾아 실행하기' 이게 시험을 반복해서 치르는 학교에서, 또 죽지 않고 여태 살아남은 김에 죽기 전까지 무한 반복해서 훈련하는 전부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역할은 설렁설렁 하고, 제가 스스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좀 더 집중하며 나름대로 잘 살다가 또 소식 전하러 오고 싶을 때 후다닥 돌아오겠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어느 새 한 달 남았어요! 미리 메리크리스마스 인사를 보내드려요 :)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맛 없는 커피는 다른 것으로 채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