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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십절 즈음에 접은 꿈

상처 치유를 위해서

10월 10일은
중화민국(대만) 사람들에게 특별한 날이다.
이름하여 쌍십절, 건국기념일.
10이 두 번 있다고 하여 쌍십절(雙十節).



1985년 쌍십절 직전에 대만을 떠났다.
총통부 앞에서 벌어지는 그 유명한 쌍십절 기념 퍼레이드를 보고 떠날 것을 많은 사람들이 권유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아 그리하지 못했다.


그 해 여름,
타이베이(臺北)에 있는 대만 사범대학 부속 국어중심(Mandarin Center)에 등록하여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법학도가 왜 중국어를?


많은 법대생이 그렇듯이 나도 재학 시절에 사법시험을 준비했었다.

두 번 연거푸 1차 시험에서 고배를 마시고 나서 깨달은 것은 이런 단거리 경주가 내게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시험 체질은 아니었어도 그래도 공부하는 것은 좋아했으므로 교수가 되기로 했다.


대학 졸업반 때 조선시대 형법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읽으면서 '아, 이거다...'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옛날법을 공부하는 것.
국사시간에 이름만 들었던 대명률, 대전회통, 경국대전을 공부하는 것.


그러려면 한문을 잘 알아야 할 것이고, 중국의 옛날법도 알아야 할 테니까 중국어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대만에서 중국어를 배우기로 했다.

대륙의 중국과는 수교하기 전이었다.


첫 돌이 지난 딸아이와 아내를 남겨두고 혼자 대만에 도착하여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일 년 이내에 딸아이와 아내가 대만에서 합류할 예정으로 하고.
그랬는데 본가에서 학비를 계속 지원할 수 없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비추어왔다.

'너만 자식이 아니고, 네 밑으로 대학생인 동생이 셋이나 있다'면서.

아내가 그 소식을 편지로 전해왔는데, 그 편지에 얼룩이 있었다.

아내의 눈물 자국...


편지를 받은 그 날은 흠뻑 취하도록 술을 마셨고 그 다음날 아내에게 전화를 하여 귀국하겠노라고 알렸다.

아내가 대만으로 날아와서는 귀국을 말렸다.

그러나 공부를 계속할 처지가 아님을 깨달은 나는 쌍십절을 며칠 앞두고 아내와 함께 귀국했다.


그 당시 부모님의 심정을 이해했기 때문에 서운하지는 않았다.

군대 제대 후 복학을 기다리는 아들이 있고, 대구에 딸 하나와 서울의 딸 하나가 대학생인 부모의 심정.


거의 삼십 년 저너머의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귀국했지만 아쉬움 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지 않은 길,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
매년 10월 10일이 되면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때의 가슴 아픈 상황...


이제 올해로 완전히 묻기로 했다.
완전히.
다만 이렇게 어딘가에는 적어놓고 잊고 싶었다.


이제는 끝.
갈 수 없었던 교수에의 꿈,
이제는 끝.
아주 끝.


아직 내게 남은 꿈,
부모의 도움 없이
내 스스로 도전해볼 수 있는 꿈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




위의 글을 적은 것이 2014년 10월이다.

뱉어내고는 잊고 싶어서였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얘기가 빈 것이 아닌 것이 어딘가에 털어놓는 것이 도움이 된다.

30년 가까이 가슴에 바위덩이를 안고사는 기분이었는데 이 글을 적고 나서는 마음이 무척 가벼워졌다.


가슴속 바위덩이는 내려놓았다고 해도 그 바닥에 남아있는 희미한 앙금까지 말끔히 없애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도 앙금은 오히려 사랑할 수 있게 된 나이가 되었다.




글로 적는다는 것,

많은 위로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틈만 나면 여기저기에 글을 적는 것을 보면

위로가 필요한 일이 내게는 아직도 많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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