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어머니'를 지우게 되겠지만
카카오톡에 새로운 친구가 떴다.
새로운 친구 이름은 <어머니>.
어머니가 카카오톡의 새로운 친구로 떴다...
어머니가...
어머니 가신지 4년이 되었는데
어머니가 새로운 친구로 떴다...
어머니 가신 후 전화기에 있는 어머니 전화번호를 그대로 두었다.
전화번호든 기억이든 '지운다'는 게 슬펐기 때문이다.
지난 4년 동안 어머니 전화번호를 받은 사람이 없었나 보다.
이제 누군가가 그 번호를 받았고
그가 카카오톡 연결을 하면서
내 카카오톡에 어머니가 새 친구로 뜬 것이다.
어머니 전화번호를 전화기에서 지울 때가 된 것이다...
어머니 전화번호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지
웠
다.
그동안 이승에서 어머니로 이어주던 끈이 사라졌다.
이 전화번호로
"누구로?"
"성시깁니다."
"아, 성시기라? 잘 있나? 모도 잘 있재?"
로 시작하던 대화가 끊어진 지 벌써 4년이나 되었지만
그런 대화를 연결해주던 도구마저 사라진다는 것은 역시나 서운한 일이다.
자주 만화영화 <코코>를 생각한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저승에 머물게 되고 일 년에 한 번 정해진 날에 이승으로 온다는,
그리고 이승에서 아무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 그때 그 영혼은 소멸하게 된다는
멕시코 사람들 이야기.
고등학생 때 그런 얘기를 들었다.
<버림받은 여인보다 더 가련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다.>
그때는 몰랐다.
잊혀진다는 것의 무게를.
아직은 어머니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사람들도 가고 나면 어머니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거고
그러면 그때는 어머니도 그야말로 '소멸'하는 것일 게다.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에 그런 가사가 있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어머니와 이별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