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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에 기대기

미국 들여다보기 (17)

조금 있으면 ‘2022년 임인년’이라는 표현을 많이 대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도 ‘희망찬 2022년 임인년 새해’라는 표현에 복 많이 받으시라느니 건강하시라느니 하는 표현을 덧붙여서 인사를 나누게 될 것이다. 언론에서도 그렇게 표현한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자. ‘2022년’과 ‘임인년’은 같은 뜻일까? 천만에 만만에. 겹치는 날들이 많기는 하지만 ‘같은 뜻’은 아니다. 2022년은 양력이고 2022년 1월 1일에 시작해서 2022년 12월 31일에 끝난다. 임인년은 음력이고 임인년 1월 1일에 시작해서 임인년 12월 30일에 끝난다. 그래서 음력인 임인년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임인년은 2022년 2월 1일에 시작해서 2023년 1월 21일에 끝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양력을 기준으로 하면 2022년 1월 1일부터 1월 31일까지는 신축년(辛丑年)이고, 2022년 2월 1일부터 2023년 1월 21일까지는 임인년(壬寅年)이고, 2023년 1월 22일부터는 계묘년(癸卯年)이 시작된다. 결국 ‘2022년’과 ‘임인년’이 같이 가는 것은 2022년 2월 1일부터 2022년 12월 31일까지이다. 많은 날들이 겹치기는 하지만 2022년과 임인년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그 출발점이 각각 2022년 1월 1일(2022년)과 2022년 2월 1일(임인년)이기 때문에 둘 사이는 한 달이나 차이가 난다.


그런데도 2022년 연초 벽두에 ‘2022년 임인년’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왜 그럴까? 그렇게 신축년, 임인년, 계묘년처럼 한자를 같이 적으면 뭔가 더 있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슬쩍 옛것에 기대어 포장을 하기도 한다.


이런 것은 미국에도 있다. 미국에서도 라틴어를 사용함으로써 뭔가 있어 보이게 하는 것이 있다. 영문으로 적어도 되지만 라틴어로 적으면 더 멋있게 보인다. 그 대표적인 문구가 ‘에 플루리부스 우눔’(E PLURIBUS UNUM)이다. 이 문구는 ‘다수로부터 하나(One out of many)’ 또는 ‘다수의 각각에서 뭉쳐진 하나가 되자!’라는 의미인데 13개 주로부터(E PLURIBUS, 다수로부터) 새로운 1개의 국가(UNUM, 하나)인 미국이 되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 문구가 13개의 글자로 된 것도 미국 독립 당시 13개 주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미국에 살면서 이 문구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일상생활에 아주 가까이 있는 문구이기 때문이다. 1달러 지폐에 적혀 있다. 1달러 지폐 뒷면의 오른쪽에 독수리가 있는 미국 국장(國章, Great Seal of the United States)에 그 문구가 적혀 있다. 독수리가 물고 있는 리본에 적혀 있는 문구가 바로 그것이다.


1달러 지폐에 적혀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주화에도 적혀 있다. 주머니 속에 있는 주화를 꺼내 확인해 보시길.


그리고 미 의회 의사당 건물 꼭대기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Freedom) 받침 역할을 하는 둥근 공 모양을 감싼 띠에도 이 글귀가 적혀 있다. 말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미국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여럿 있다. 횃불을 들고 있는 뉴욕에 있는 것은 Statue of Liberty라고 적고, 워싱턴 DC의 미 의회 의사당 건물에 있는 것은 앞에서 보았듯이 Statue of Freedom라고 적는다.


미 해병대의 신조가 Semper Fidelis이다. 이 역시 라틴어이다. 뜻은 언제나 충성(Always Faithful)이다. 이 Semper Fidelis는 보통 줄여서 Semper Fi라고 많이 쓰는데 해병대 출신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의 자동차 범퍼 스티커에서 자주 보이는 글귀이다. 물론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Once a Marine, Always a Marine)이라는 말도 쓰인다.


대학 사교 클럽의 경우에는 그 이름에 그리스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Alpha Delta Gamma(ΑΔΓ), Alpha Gamma Omega(ΑΓΩ), Alpha Sigma Phi(ΑΣΦ), Kappa Alpha Psi(ΚΑΨ), Alpha Phi Gamma(ΑΦΓ) 같은 클럽이 있는데 이런 이름들이 젊은이들에게 퍽 멋스럽게 보이겠다는데 동의한다.


중고등학교에서도 라틴어 교훈(motto)을 사용하는 학교가 있다. 버지니아주 알링턴 카운티에 있는 H-B Woodlawn Secondary Program(보통 줄여서 H-B Woodlawn, H-B, HBW라고 적음)은 Verbum Sap Sat가 교훈이다. 이것은 라틴어 Verbum sapienti sat est를 줄인 말이다. 뜻은 A Word to the Wise is Sufficient인데 ‘현명한 사람에게는 한 마디면 된다’, ‘현명한 사람에게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정도로 번역하면 될 것 같다.


사실 라틴어는 우리에게도 아주 낯선 것만은 아니다. 여러 대학에서 자신을 표현할 때 라틴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서울대 VERITA S LUX MEA(진리는 나의 빛), 연세대 Veritas vos liberabit(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서강대 Obedire Veritas(진리에 순종하라), 광운대 Veritas et Lux(참, 빛)의 경우가 그렇다.


우리나 미국이나 멋스럽게 보이고 싶을 때 사람들이 옛것에 슬쩍 기대는 것을 보면 사람 사는 것은 다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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