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인감증명서 신청 과정을 지켜보면서
부동산 거래처럼 중요한 법률행위를 할 때에는 아무 도장이나 막 찍는 것이 아니고 인감도장이라는 조금 특별한 도장을 찍는다. 그리고 거기 찍은 도장이 관공서에 신고된 바로 그 도장임을 증명하기 위해 인감증명서라는 서류를 첨부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중요한 법률행위를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즉 인감도장을 찍고 인감증명서를 첨부함으로써 그 서류가 거기 기재된 바로 그 사람의 진정한 의사에 터 잡아 작성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회사 같은 법인도 그렇다. 법인도 인감도장이 있고 법원에서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많은 것이 컴퓨터화되면서 지금은 무인발급기로도 법인인감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여기서 먼 옛날 얘기 하나.
인감증명서 양식이 얇은 종이에 인쇄되어 있고, 그 양식에 필요한 사항을 적은 후 그 양식에 법인이 가지고 있는 인감도장을 찍어서 법원에 제출하던 시절이니까 이제는 뭐 거의 전설이 된 얘기다.
인감증명서 양식을 받은 법원은 그 양식에 적힌 사항들이 법원이 가지고 있는 법인등기부에 기재된 사항과 일치하는지 살피고, 인감증명서 양식에 찍힌 도장의 인영이 법인인감대장에 등재되어 있는 인영과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두 개의 인영이 일치하면 양식에 있는 ‘이 도장의 인영은 법원이 가지고 있는 법인인감대장에 있는 인감도장의 인영과 일치한다’는 뜻을 담은 기재 부분에 법원 도장을 찍어줌으로써 인감증명서가 발급되는 것이다.
그 옛날에 다니던 회사가 취급하는 물품이 전국적으로 판매되는 것이었고 그러다 보니 물품대금에 관한 소송도 전국 각처에서 벌어졌다. 그날도 소송 수행을 위해 출장 중이었는데 시골의 자그마한 법원에 들릴 일이 있었다.
어떤 서류의 발급을 신청을 해놓고 결과물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창구에 서있었다. 그때 젊은 여자 하나가 오더니 거의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주임님, 뭐가 틀린 겁니까?
뭐가 틀렸는지 말해 주셔야 제가 고칠 거 아닙니까?"
그 여자가 내민 서류를 슬쩍 보니 법인인감증명 신청서였다.
그 여자는 울기 일보 직전의 음성으로 사정사정하지만 창구직원은
"틀렸으니까 틀렸다고 하는 거 아냐.
다시 만들어와."
하고 냉정하게 말하고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여자가 징징 우는 소리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인감증명 발급신청서를 흘깃 보고는 무엇이 문제인지 즉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법인 대표 이름의 한자 표기에 잘못이 있었다. 이름에 균(均)이 들어있었는데 균의 오른쪽 부분을 勿로 적었던 것이다. 균의 오른쪽 부분을 勿로 잘못 적은 것을 법원공무원은 알고 있었다. 한자로 적은 이름이 잘못 기재되어 있으므로 법원공무원 입장에서는 인감증명서를 발급해줄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오히려 발급하면 문제다. 잘못된 인감증명서가 발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자 均(균)의 이런 차이를 알기 위해서는 한자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 한자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시대의 이 젊은(사실은 어린) 여자가 이런 차이를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은
- 그 여자는 법원 앞에 있는 법무사 사무실 직원이고
-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 이미 어제부터 이 법인인감증명의 발급이 거절되었고
- 이 여자는 법인 대표 이름 균(均)의 한자가 잘못 기재되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 무엇이 문제인지 알만큼 한자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는 정도였다.
나는 운이 좋아서(!) 국민학교 때부터 한자를 배웠다. 4학년인지 5학년인지부터 국어책에는 단어 옆에 괄호가 있고 그 괄호 안에 한자가 적혀 있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수업시간표에 아예 ‘한문’이라는 시간이 1주일에 한 시간씩 배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자 교육에 관한 문교 정책이 얼마나 자주 바뀌었는지 나와 두 살 터울인 남동생은 학교에서 한자를 배웠지만 두 살 위의 누나와 세 살 밑의 여동생은 한자를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그 여직원의 한자실력을 탓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역시 갈팡질팡 문교 정책의 피해자니까.
그 여직원은 발급 거절의 이유를 알지도 못한 채 이틀째 헛걸음을 한 것이다. 울상이 되어 돌아가는 그 여직원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아, 이 사람 참. 법원 드나들면서 일을 해야 한다면 창구직원과는 무조건 잘 지내야 하는 거야. 법원만 그런 게 아니야. 세상 그 어디든 창구가 있는 곳에서는 창구직원과 잘 지내야 하는 거라구. 먹고사는 게 다 그래...'
뒤돌아보면 후회되는 일이 많지만, 그날 그 여직원의 뒤를 따라 나가서 무엇이 문제인지 말해주지 않은 것이 지금도 후회된다.
그 아가씨,
결국 해냈을 거다.
그리고 그 일로 해서 그 아가씨가 더욱 강해졌기를 충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