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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수와 서수

미국 들여다보기 (37)

영어로 배우는 노래 중에 그런 게 있었다. one little, two little, three little indians / four little, five little, six little indians… 지금은 유치원생이 배우는 노래이지만 70년대 초반에 중학생이 되어서야 배웠다. 물론 이 노래를 배우기 전에 원, 투, 쓰리, 포로 시작해서 텐까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때는 권투가 인기 종목이었고, KO가 되려면 텐까지 세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프로 레슬링은 ‘원, 투, 쓰리’로 끝났지만.


중학생이 되면서 텐 이후의 숫자를 배우게 되었다. 텐 다음에 나오는 것이 일레븐과 트웰브다. 우리처럼 텐 원, 텐 투하면 될 터인데 왜 이렇게 복잡한 철자로 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옛날의 영국이 십이(12)진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


트웰브 다음은 좀 낫다. 써틴, 포틴, 피프틴으로 나가면서 뭔가 쓰리부터 나인까지의 발음과 비슷하니까. 그러고 나면 트웬티가 되고 트웬티 원, 트웬티 투로 이어지면서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트웬티 다음에 원, 투, 쓰리를 붙여나가면 되니까. 써티, 포티, 피프티로 이어지는 것도 쓰리, 포, 파이브와 발음이 같거나 비슷하고 거기에 원, 투, 쓰리를 붙여 나가는 같은 원리라서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퍼스트, 세컨드, 써드를 배우면서 그나마 좋았던 시절이 다 갔다. 느닷없이 ‘기수’와 ‘서수’라는 처음 듣는 단어를 이해해야 했다. 사과를 셀 때 한 개, 두 개, 세 개 하면서 세는데 이렇게 하나, 둘, 셋, 넷 하면서 개수를 세는 것이 기수라고 했다. 자녀가 여럿일 때 첫째, 둘째, 셋째, 넷째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순서를 나타내는 수가 서수라고 했고.


서수의 첫 부분인 퍼스트, 세컨드, 써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동네 야구에서 일루, 이루, 삼루를 퍼스트 베이스, 세컨드 베이스, 써드 베이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일 뿐이다. 써드 다음부터는 고행의 연속이었다. 포스, 핍스, 식스스, 세븐스, 에잇스, 나인스, 텐스. 포에서 텐까지의 단어에 th를 붙이는 것이어서 이해는 쉬웠지만 발음은 어려웠다. 열한 번째에서 열아홉 번째까지도 그런대로 해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스물한 번째가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그냥 그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th를 붙여서 트웬티 원스(21th), 트웬티 투스(22th), 트웬티 쓰리스(23th) 이러면 좋을 텐데 퍼스트, 세컨드, 써드가 다시 등장했다. 그래서 트웬티 퍼스트(21st), 트웬티 세컨드(21nd), 트웬티 써드(23rd)가 되었다. 그 후에는 다시 th를 붙이는 트웬티 포스(24th), 트웬티 핍스(25th)로 이어지는 체제로 전환했다. 그러더니 30대인 써티로 넘어가면서 써티 퍼스트, 세티 세컨드, 써티 써드로 돌아오더니 그다음은 다시 th를 붙이는 써티 포스로 방향 전환. 고난의 연속이다.


자,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자. 영어로 뭔가를 세는 게 어렵다고? 그런가? 그럼 우리는 쉬운가? 우리는 뭔가를 셀 때 간단한 것 같은가? 정말 그런가 한 번 생각해보자.


지금 시각이 ‘3시 15분 40초’라고 가정해보자. 이 시각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세 시 / 십오 분 / 사십 초’라고 말한다. 그 누구도 ‘세(3)시’를 ‘삼 시’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십오(15)분’을 ‘열다섯 분’이라고 말하지 않고 ‘사십(40)초’를 ‘마흔 초’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시각을 말하는 것을 기수와 서수와 연결해보면 이게 보통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시는 서수로 읽고, 분과 초는 기수로 읽는다. 기수와 서수의 범벅이기 때문에 우리말을 배우는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시는 서수로 읽는다고 하면서도 또 문제가 있다. 바로 ‘한 시’ 때문이다. ‘두 시’는 ‘둘째 시’를 말하고 ‘세 시’와 ‘네 시’는 ‘셋째 시’와 ‘넷째 시’를 말한다. ‘둘째, 셋째, 넷째’는 서수이다. 그런데 ‘한 시’의 ‘한’은 ‘하나’에서 온 것이므로 이것은 기수이다. 시를 읽을 때에도 기수와 서수가 섞여 있다.


그리고 시를 서수로 읽는 것은 오전, 오후라는 표현을 함께 쓰는 12시간제로 읽을 때 그렇다는 얘기이고 24시간제로 읽을 때에는 기수로 읽는다. 12시간제의 오전 일곱 시, 오후 세 시는 서수가 쓰이지만 24시간제의 공칠(07)시, 십오(15)시는 기수가 쓰인다.


물이 든 병을 셀 때 ‘열 병’이라고 말하지 ‘십(10)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옷을 셀 때에도 ‘다섯 벌’이라고 말하지 ‘오(5)벌’이라고 하지 않는다. 닭도 ‘세 마리’라고 하지 ‘삼(3)마리’라고는 하지 않는다. 호박 ‘한 개’라고 하지 ‘일(1)개’라고 하지 않는다. 설혹 ‘10병, 5벌, 3마리, 1개’라고 적혀 있어도 우리는 자동적으로 ‘열 병, 다섯 벌, 세 마리, 한 개’로 읽는 것이다. 이런 것을 우리말을 배우는 외국인이 쉽게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뭐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영어로 숫자를 세는 것이 어렵고 복잡하다고 투덜투덜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사족 하나.

시각을 읽는 방식 말고도 월을 읽을 때에도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 6월은 ‘육월’이 아니라 ‘유월’이라고 읽고, 10월은 ‘십월’이 아니라 ‘시월’이라고 읽는다. 그래서 6월 6일은 유월 육일이 되고 10월 10일은 시월 십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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