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개인이 정한 원칙
보통사람이 법전을 떠들쳐볼 일은 없다. 좋은 일이다. 법전을 펼쳐본다는 것은 대개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당사자 사이에 합의가 되지 않아 결국 '법이 정한 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옛날 법학과 학생은 법전 들여다보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 민법의 초반 구조는 이렇다.
제1편 총칙
제1장 통칙
제1조(법원) 민사에 관하여 법률에 규정이 없으면 관습법에 의하고 관습법이 없으면 조리에 의한다.
제2조(신의성실) ①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②권리는……
제2장 인
제1절 능력
제3조(권리능력의 존속기간) 사람은 생존한 동안……
제4조(성년) 사람은 ……
다음은 우리 형법의 구조.
제1편 총칙
제1장 형법의 적용범위
제1조(범죄의 성립과 처벌) ① 범죄의 성립과 처벌은 행위 시의 법률에 따른다.
② 범죄 후 법률이 변경되어……
③ 재판이 확정된 후 법률이 변경되어……
제2장 죄
제1절 죄의 성립과 형의 감면
제9조(형사미성년자) 14세되지 아니한 자의 행위는……
제10조(심신장애인) ①심신장애로 인하여……
이 두 가지 대표적인 법률에서 알 수 있듯이 법조문은 일정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 형식의 대표적인 것이 편/장/절/조/항/호의 순서로 나간다는 것이다. 편, 장, 절, 조는 제1편, 제2장, 제3절, 제4조의 형식을 갖는다. 그리고 항은 동그라미 안에 숫자가 들어있고, 호는 아라비아 숫자 다음에 마침표를 찍는다.
회사 다니던 시절 많은 시간을 회사를 대리해서 물품대금 관련 민사소송에 참여했다.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고 상대방이 제기한 소송에 대응하기도 했다. 이러한 제소와 응소에는 솟장, 답변서, 준비서면 등의 각종 서면을 법원에 제출하는 일이 필수적으로 따르게 된다. 이때 주장 사실을 명확하게 하고 주장 내용의 연관성을 일목요연하게 하기 위해 서면에 번호를 부여할 때에는 다음의 원칙을 정한 후 그에 따랐다.
1.
가.
1)
가)
(1)
(가)
①
㉮
아라비아 숫자와 가나다를 번갈아 사용하되
처음에는 그대로,
다음에는 반 괄호,
그다음에는 온 괄호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그라미 안에 넣었다.
이렇게 하면 법관이 제출된 서면을 읽을 때 나.에서 진술한 내용은 앞에 나왔던 가.와 관련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고, (2)에서 진술한 사항은 앞의 (1)와 연결시켜 살펴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 관공서에서 정한 규정이나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개인의 원칙일 뿐이었다. 초점은 이렇게 번호를 부여함으로써 일관성을 유지하고 문장 단락의 연관성을 쉽게 알아보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원칙에 따라 작성해서 법원에 제출한 서면을 법관이 쉽게 알아보기는 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변호사가 아닌 일개 회사 직원이 제출한 서류에 대해 이해가 안 된다고 불평한 법관은 없었고 다시 정리해서 제출하라고 명령한 법관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