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 대한 스포일러가 들어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드라마 <레이디 두아>를 보았다. 상당히 흡입력 있는 이야기였고, 신혜선의 연기를 보는 맛이 쏠쏠했다. 이제는 완전체가 아닌가 싶은 배우다. 박수를 보낸다.
<레이디 두아>는 가짜일지라도 명품이 되고 싶었던 여자 '사라 킴'과 그녀의 뒤를 쫓는 형사 '무경'의 지독한 추격전을 그린다. 표면적으로는 쫓고 쫓기는 범죄 스릴러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사라 킴'이라는 인물의 처절한 생존기와 그 속에 투영된 우리 사회의 허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물건의 가치는 누가, 어떻게 매기는가?]
8부작 내내 시간의 순서를 뒤섞어 놓은 구성은 시청자에게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이 불친절한 서사는 역설적으로 사라 킴의 파편화된 삶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그녀의 삶은 모든 것이 가짜다. 수시로 바뀌는 신분, 만나는 사람마다 달라지는 거짓말, 심지어 반대로 짚는 목발까지. 그녀의 세계에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 기만은 단순한 유희가 아닌 '사활이 걸린 생존'이었다. 밑바닥 인생에서 빚더미에 올라앉은 그녀가 자신을 구원할 유일한 길은 '진짜 자신'을 버리는 것뿐이었다. 모든 걸 내려놓았을 때 그녀가 발견한 돌파구는 '진짜 같은 가짜'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쇠파이프에 도금한다고 금파이프가 되지는 않지만, 모두가 그것을 금이라 믿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시장에서 금으로서 기능한다는 사실을. 사라 킴의 전술은 치밀했다. 스스로를 '성공한 여성'이라는 환상으로 포장해 투자금을 끌어내고, 권력자들을 이용해 백화점 입점이라는 실체를 만들어냈다. 가짜였던 '부두아'가 진짜 명품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우리는 흔히 가치를 기능이나 원가에서 찾으려 하지만, 명품의 세계는 다르다. 명품의 가치는 기능적 효용이 아니라 타인의 인정과 희소성, 그리고 '우월감'에서 나온다. 사라 킴은 오히려 고객을 거부함으로써 '부두아'에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입혔다. 사람들이 갈망하게 만드는 스토리를 주입한 순간, 부두아는 더 이상 가짜가 아니게 된 것이다.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선은 존재하는가?]
사라 킴은 '부두아'를 진짜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은 더욱 깊은 가짜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긴다. 나를 '나'라고 정의하는 것은 무엇인가?
외형인가? 극 중 사라 킴의 신원을 증명했던 것이 발목의 문신이었다면, 성형수술로 외형을 바꾼 인간은 가짜인가? 그렇다면 기억인가? 내가 나로서 살아온 기억이 나를 정의한다면, 기억을 잃거나 타인에게 기억이 이식된 경우의 나는 누구인가?
드라마는 진짜와 가짜를 무 자르듯 나눌 수 없음을 반복해서 암시한다. 적어도 그녀를 믿었던 투자자들과 대중에게 사라 킴은 완벽한 '진짜'였다. 진실이 폭로되기 전까지 그 가짜는 현실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가장 아이러니한 지점은 진짜가 된 가짜, 사라 킴이 또 다른 가짜를 경멸하는 순간이다. 부두아의 가방을 실제로 제작하고 사라 킴을 사칭하려 했던 '김미정'을 향해 그녀는 차갑게 내뱉는다. "아무리 발악해도 가짜는 결국 가짜야." 누구보다 가짜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그녀가 던지는 이 일갈은, 그녀 스스로가 '부두아'라는 허상을 얼마나 완벽하게 '진짜'로 믿고 싶어 했는지를 보여주는 서글픈 대목이다.
[살기 위한 '위악'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결국 사라 킴의 마지막 선택은 필연적이다. 본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김미정이 되어, 자신이 창조한 '사라 킴'과 '부두아'라는 브랜드를 영원히 진짜로 남기는 것. 자신이라는 실체는 사라질지언정, 자신이 만든 환상은 불멸의 진짜로 박제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녀의 사기 행각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하지만 "왜 그런 가짜 삶을 살았냐"는 물음에 그녀는 아마 죽을 때까지 같은 답을 할 것이다. "그것은 사활의 문제였다"고. 벼랑 끝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 그 처절한 연극이 과연 개인의 죄악이기만 한 것인지, 아니면 이 사회가 공모한 비극인지, 드라마 <레이디 두아>는 묵직한 질문을 남긴다.
#레이디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