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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서울 - 행복의 기준

by 강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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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 대한 스포일러가 들어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드라마 <미지의 서울>을 보았다. 보고 난 뒤, 한동안 많은 생각에 잠겼다. 여러모로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하는 작품이었다.


<미지의 서울>은 쌍둥이 자매 '미지'와 '미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어떤 사건으로 서울 회사 생활에 완전히 지쳐버린 동생 '미래'를 대신해, 언니 '미지'가 동생의 회사에 출근하면서 드라마의 막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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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아픔은 있다]


<미지의 서울>은 각 인물이 가진 저마다의 아픔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겉보기엔 서울의 공기업에 다니며 멋진 삶을 사는 듯하지만,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힘겨워하는 '미래'. 항상 밝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은 하나뿐인 꿈을 잃고 방황하는 '미지'. 서울에서 손꼽히는 로펌에 다니는 남부러울 것 없는 변호사지만, 과거의 상처와 장애에 얽매여 헤어나오지 못하는 '호수'. 이들 모두 저마다의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살다 보면 많은 일을 겪고, 그 안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는다. 중요한 것은 그 아픔에서 어떻게 헤쳐 나오느냐일 것이다. <미지의 서울>은 이 아픔을 혼자 견디지 말라고,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미래'도, '미지'도, '호수'도 모두 자신의 아픔을 혼자 감당하려 애쓴다. 하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그렇게 벼랑 끝으로 내몰린 순간,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회사에서 코너에 몰린 '미래'를 구한 건 하나뿐인 쌍둥이 '미지'였다. 서울도, 회사도 아무것도 모르는 '미지'는 동생을 위해 기꺼이 손을 내민다. 한때 육상선수였던 '미지'가 발을 다치고 히키코모리가 되었을 때, 그녀에게 손을 내민 건 엄마와 할머니였다. 어릴 적 사고의 여파로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호수'에게 손을 내민 건 그의 엄마, 그리고 '미지'였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또 도움을 받으며 삶을 지탱한다. 사람 인(人) 자가 두 사람이 서로 기댄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이야기처럼, 사람은 본디 혼자가 아닌 여럿과 함께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사회적 동물이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처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미지의 서울>은 잔잔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참 좋았다. 괜스레 내 아픔을 누군가 가만히 들어주는 듯한 위로를 받았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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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해야 안다]


<미지의 서울>은 소통의 부재가 만든 오해의 벽을 보여준다.


'미지'는 어릴 적 '호수'가 '미래'와 사귄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호수'는 '미래'가 아닌 '미지'를 좋아했다.


'호수'는 어머니가 자신을 억지로 떠안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또한 사실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호수'를 진심으로 아들로서 아끼고 위하는 사람이었다.


이 외에도 미지의 어머니와 할머니, 미지와 동창 지윤 사이의 오해 등 수많은 갈등이 등장한다. 이 모든 것은 말 한마디를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오해를 푸는 데는 진심을 담은 말 한마디면 충분할 때가 많다. 서로 속마음을 터놓지 않으니 오해가 싹트고, 주변의 말에 흔들리며 오해는 눈덩이처럼 커져간다. 그리고 커져버린 오해를 안은 채 시간이 지나면, 뒤틀린 감정은 그대로 굳어버린다.


누구에게나 입장 차이는 존재한다. 내 입장이 있듯, 상대의 입장도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대화가, 그리고 말 한마디가 중요하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처럼 소통의 힘은 굉장하다. 말은 해야 아는 것이니, 마음속에만 꾹꾹 눌러 담지 말고, 속 시원히 털어놓는 용기를 내보는 건 어떨까. 오해로 흘려보낸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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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준]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타인과의 비교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바야흐로 TMI의 시대다. 과거에는 어머니들 사이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엄친아'가, 이제는 SNS를 통해 전국의 '엄친아'로 확장되었다. 타인의 학력, 직업, 연봉, 재산 등 너무 많은 정보가 열려있고, 그 정보와 나의 상황을 비교하며 점점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남들보다 못한 학력, 남들보다 못한 직업, 남들보다 못한 연봉은 나의 행복의 크기를 갉아먹는다. 극 중 '미지'가 '호수'의 전 직장 동료들을 만났을 때, 갑자기 동생 '미래'인 척 연기하는 장면이 있다. 그 모습에 '호수'는 실망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미지'는 창피해서 그랬다고 말한다. 명색이 변호사 여자친구인데 백수라고 소개하기 민망했다는 것이다. '호수'는 그게 무슨 문제가 되냐고 반문한다.


맞다. 변호사 여자친구라고 해서 백수이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그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한다. 본능적으로. 소위 말하는 '급'을 따지는 것이 우리 사회의 익숙한 문화이기 때문이다. 연애도, 결혼도 비슷한 '급'끼리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데도 주변에서는 '누가 더 아깝다'며 가만두질 않는다. 이런 사회 풍조가 SNS를 통해 더욱 가속화된 느낌이다.


그런데 행복이 과연 객관적인가? 아니다.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내가 오늘 케이크 한 조각을 먹으며 행복을 느꼈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너무 거창한 무언가를 좇을 필요는 없다. 또한 SNS 속 모든 사람이 정말 나보다 행복할까? 그들 역시 저마다의 아픔이 있을 것이고, 그중에는 허풍을 떠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좋은 것만 보여주는 SNS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


나이가 들수록 '현실적으로'라는 말을 참 많이 하게 된다. 꿈과 행복을 좇는다는 건 말로는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많다. 하지만 그 현실이 나를 너무나도 괴롭게 한다면, 그 쳇바퀴를 그대로 돌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극 초반 '미래'는 정신적으로 벼랑 끝까지 몰렸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고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정말 '현실적으로' 맞는 선택이었을까?


<미지의 서울>을 통해 나의 행복의 기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타인의 시선을 너무 신경 쓰며 사는 건 꽤 피곤한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내 삶이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 나는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그래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나'가 아닌 '남'을 중심으로 내 세상을 돌릴 필요는 없으니까.

여러분은 어떠한가? 작중의 '미래'와 '미지'는 모두 저마다의 행복을 찾았다. 그 행복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미지'는 뒤늦게 대학에 갔고, '미래'는 농사를 지으며 하고 싶었던 투자 블로그를 운영한다. 누군가는 '미지'를 보며 "그 나이에 대학 가서 뭐 하려고?"라고, '미래'를 보며 "그 좋은 공기업 그만두고 고작 농사일이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선택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찾기 위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한 것이니까.


끝은 몰라도 시작은 해야 한다. 여러분도 행복을 찾기 위한 '시작 버튼'이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보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배우 박보영의 연기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캐릭터의 복잡한 감정선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그녀의 연기 하나만으로도 이 드라마를 볼 이유는 충분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드라마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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