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건축은 IT가 짓는다

by 까치발

한 시대의 변화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스며듭니다.

AI는 이미 산업의 경계를 허물며 사람들의 일과 창작 방식을 완전히 바꾸고 있습니다.

영화 산업에서는 과거 수주가 걸리던 CG 작업을 이제는 AI가 단 몇 분 만에 완성합니다.

패션 산업에서는 디자이너보다 먼저 AI가 트렌드를 분석하고,

가상모델이 실제 런웨이에 서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음악, 광고, 출판까지 거의 모든 산업이 기술을 통해 속도와 효율을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건축은 여전히 느립니다.


시간이 곧 품질이라 믿는 산업의 특성상 변화는 늘 조심스럽고 기술의 도입은 신중합니다.

보수적인 구조 속에서 새로운 시도는 여전히 ‘위험’으로 간주됩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공간을 짓는 산업이 가장 닫힌 공간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 변화를 먼저 시도하는 이들이 정작 건축가나 건설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건축의 바깥, 즉 프롭테크(Proptech) 기업들이

데이터를 분석하고, 대지를 시뮬레이션하며,

건축을 ‘공간’이 아닌 ‘서비스’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건축을 직접 짓지 않지만,

그 과정 전체를 디지털로 번역하며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 흐름을 보며 깨달았습니다.

문제는 기술의 부족이 아니라 사고방식의 낡음이라는 것을요.

AI를 도입하는 일은 도면에 한 줄을 더 그리는 일이 아니라,

건축을 다시 정의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건축의 언어를 IT의 문법으로 바꾸는 시도를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도면을 자동화하거나 구조를 계산하는 수준이 아니라,

기획, 설계, 공법, 에너지, 유지관리까지—

건축의 전 과정을 기술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이제 건축은 IT가 짓는다’의 시작점입니다.


건축의 언어를 IT의 문법으로 바꾸다


그래서 저는 건축에 IT를 얹기 시작했습니다.

도면을 자동으로 그리고, 구조를 시뮬레이션하는 수준이 아니라

건축의 전 과정을 IT의 언어로 번역하는 시도였습니다.


대지의 문제를 인식하고, 설계 방향을 정의하고,

디자인 컨셉부터 공법, 에너지, 유지관리까지—

모든 과정을 AI 도구로 실험했습니다.

그 결과 단순히 효율이 높아진 것을 넘어,

‘실현 가능한 지속가능 건축’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접근은 말뿐인 친환경이나 추상적인 스마트건축이 아닙니다.

대지 분석 단계에서부터 AI가 환경 데이터를 해석하고,

에너지 흐름과 동선을 계산하며,

탄소 저감과 운영 효율을 설계 단계부터 반영합니다.

AI가 건축의 가능성을 넓혀주는 것이죠.


그리고, 첫 번째 실험


얼마 전 저는 한 건축 입찰 제안에 참여했습니다.

국내의 내로라하는 건축사사무소들과 대형 건설사들이 참여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다만 조금 달랐던 점은,

저는 IT 회사의 이름으로 그 경쟁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방식이었다면,

5~6명의 팀이 한 달 반 동안 밤을 새워 설계하고,

외주 CG팀과 모형 제작사, 인쇄소까지 총동원해

3~4억 원의 예산을 투입했을 겁니다.

저 역시 건축가 시절, 그렇게 일했습니다.

모두가 지쳐 쓰러질 때쯤 결과물이 나오고,

그중 한두 팀만이 최종 무대에 오르는 구조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AI와 IT 도구를 활용해, 거의 혼자서 제안을 완성했습니다.

대지분석, 문제인식, 컨셉, 디자인

그리고 비즈니스 확장 시나리오와 제안서 작성까지.

1인 작업이었지만, 과거의 1/20도 안 되는 비용으로 전체를 마쳤습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습니다.

제출 형식의 제약도 있었고,

AI가 아직 완전히 사람의 손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과는 분명했습니다.

“기술이 건축의 언어를 새로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변화는 작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이 경험을 통해 저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건축이 더디게 변하는 산업일지라도,

누군가는 그 벽을 두드려야 한다는 것을요.

기술은 단지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방식과 산업구조를 바꾸는 도구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산업이 AI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건축이 그 흐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이유는 없습니다.

AI는 건축가를 대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건축가가 더 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제 건축은 IT가 짓는다’는 말은,

단순히 기술이 공간을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술을 이해하는 건축가, 그리고 건축을 이해하는 IT가 함께 만드는 시대,

그 첫 장을 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그 교차점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건축을 짓기 전에

먼저 데이터를 설계하고, AI와 함께 도면을 그립니다.

언젠가 이 시도가 당연한 일이 될 그날을 기다리며,

저는 오늘도 ‘IT가 짓는 건축’을 현실로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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