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도 부모에 의지하지 못했고, 성인이 된 후에도 그 누구에게 의지하지 못했다. 의지하고 싶었으나 수용받지 못했던 경험은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의지 못하는 마음 상태로 나 자신을 다그치며 짊어졌던 삶의 무게는 어깨를 짓누르고, 여러 형태의 병으로 나타났고, 극심한 불면증에 잘 수 없는 상태로 15년을 살게 했다. 그러다 멈출 수밖에 없는 병이 오고서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나’를 들여다보게 됐다.
외면해 왔던 슬픔, 억울함, 서운함, 미움, 원망, 두려움, 불안감, 긴장감, 외로움, 허무함 등의 감정들이 들어있었다. 게다가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일상생활도 안 되는 몸으로 일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었다. 그러다 보니 평범하게 직장을 나가 돈을 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 앞에 놓여 있었다. 내 몸이지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앞으로 남은 살날이 비참했다. 몸이 이제 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것에 절망했다. 앞으로 어떻게 돈을 벌고 먹고살지가 막막했다.
동굴 안에서 깊은 터널을 파고 또 파서 들어갔다. 어느 순간 자존감은 사라졌고, 정체성마저 혼란스러워졌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순간 사라지고 싶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나 자신이 목숨 줄을 놓는 순간이 오지 않도록 다시 한번 이 고비를 넘기기 위해서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했다. 자살 충동성이 높았던 탓에 처방해 준 약을 한두 달 복용하며 느낀 느낌은 새장 안에 가둔 듯했다. 내 마음 안에서 차츰 살아갈 방법을 찾고자 하는 의지가 올라왔지만 그것을 위에서 억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충동성을 무기력하도록 만드는 효과였던 걸까? 자살 충동의 시기가 지나자 그 무기력함이 내가 살고자 하고, 하고자 하는 마음조차 무기력화 시키려 하는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상담을 통해 약에 변화를 주었고, 차츰 줄여 끊을 계획을 세웠다.
시간이 흘러 이전 방식과 다르게 내게서 답을 찾고자 노력했다. ‘나는 누구인가?’ ‘왜 태어났는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내게 진심 어린 질문을 반복했다.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이렇게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 ‘죽지 않고 살아있어 줘서 진솔아, 너무 고마워’ ‘많이 힘들었지. 많이 외로웠지. 내가 돌봐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네가 행복하도록 이제 내가 책임질게. 아프지 않게 돌봐줄게.’ ‘애썼고 너무 고맙고 미안했어’ 진정성 있는 사과와 수용, 감사의 마음이 우러났다.
나 자신이 나에게 관심을 갖고, 질문을 하고, 감정을 들어주고, 수용해 주며, 답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나 자신’과의 사랑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나와의 사랑이 시작되고, 사랑과 감사의 질이 예전과 다름을 느낀다.
또한, 스스로 움직여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 눈으로 볼 수 있고, 내 귀로 들을 수 있고, 내 입으로 말할 수 있고, 내 발로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고, 내 손을 쥐고 움직일 수 있는 것에 무한한 감사가 올라왔다.
감사하는 마음은 이해하던 것에서 그냥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변화시켰다. ‘그래, 이 사람은 나랑 다르니까 이해하자.’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었고, 서로가 다름을 알았을 때는 그것으로 이해하려 했었다. 이해한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었다. 마음으로 아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은 때로 서운해하기도 했고, 실망하기도 했다.
상대에게서 감사한 것을 발견하는 마음은 감사함을 보다 확장시켰다. 받은 것에 대한 감사는 바로 마음에서 느끼고 우러나 표현하게 됐다. 그러나 익숙해졌거나 미처 발견하지 못한 감사한 것에서는 쉽게 감사함을 놓치곤 했다. 놓친 감사함을 찾으니 내 삶이 먼저 충만해졌다. 충만해지니 더불어 감사함을 느끼고, 표현하게 되었다. 표현하니 상대도 예전과 다르게 감사함을 표현해 왔다.
예전 나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몸 배터리로는 하고 싶은 일조차 모두 진행할 수 없었고, 하루에 하나씩 하이라이트를 정해서 진행해 갈 수밖에 없었다. 책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런 상황이지만, 하루에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진행되는 속도가 너무 답답하고 빨리 뭔가가 눈에 보이길 바라며 초반에는 예전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예전처럼 진행했다가 며칠을 앓아눕고는 했다. 쏟아붓고 앓아눕고를 몇 번 반복하며 내 몸 상태를 받아들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이 시간은 아팠다. 몸뿐 아니라 마음도 참 많이 아팠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것이 있음이 감사했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음에 감사했다. 이 아픈 시간을 버티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감사함이었다.
이 시간들은 나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변화를 가져왔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가정을 돌볼 가정주부로 며느리로 딸로 가지고 있던 필수적인 많은 역할이 있었다. 그 역할을 해야 하지만 할 수가 없어 죄책감이 컸다. 죄책감은 누가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짊어진 것이었고, 해오던 사고방식이었다.
가족들에 대해 짊어진 죄책감을 덜어준 것은 가족들이었다. 가족이었지만 내 아픔 정도는 알기 어렵다. 가족이 내 건강상태와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받아주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가져지고 나서는 발 벗고 나서주었다. 가족이 가지는 시간과 동일하게 나도 내 상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했고, 가족들의 믿음과 사랑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나를 깰 수 있었고, 감사한 마음으로 기꺼이 받으며 의지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신랑에게는 나만큼이나 온전히 의지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의지라는 것은 모든 것을 상대에게 의지하고, 바라는 마음이 아니다. 내 역할을 최대한 하지만 부족해도 메워주고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에서 오는 안도감과 풍요로움, 감사함의 마음이다.
불면증이 현재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극심하던 불면의 상태가 양호해지고 있고, 머지않아 이조차도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현상은 감사함의 시작과 감사함이 일상이 된 내게 온 또 하나의 선물이다.
더불어 감사함은 내면의 행복이 주는 평온함까지 선사한다. 외부에 시선을 두고 살아왔던 시간은 물질적 풍요, 조건, 성공 등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내면에 시선을 두니 내게 있어 어떤 순간이 행복한 순간인지 알게 되었다. 미움, 분노가 아닌 사랑하고 있을 때, 누군가 해낸 것을 보고 배우고 싶은 분야를 배우고 있을 때, 싫은 것에서 좋은 것으로 관심을 옮겼을 때, 이뤘을 때의 만족감과 성취감을 떠올릴 때, 사랑하는 가족들과 행복하게 웃을 때, 건강하게 움직일 때, 사람들이 나의 베풂에 감사함을 전해올 때,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때 등이다.
내면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이전과 다르게 선택하고 있고, 마음 안에 평정이 깃들어 있는 상태가 평온하고 평화로워 이 선택을 반복하게 된다. 고마워하고 감사함을 찾는 노력은 사소한 것에도 감사함을 찾을 수 있는 힘이 되었고, 감사함으로 대한 태도는 감사할 일로 되돌아왔다. 내 안의 감사를 찾으면, 감사는 나에게 더 큰 풍요를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