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20kg 씨감자 한 상자가 배송됐다.
“씨감자를 벌써 샀어?”
그에게 물었다.
“응, 올해는 3월 초에 심을 거야.”
“너무 빠르지 않아?”
“괜찮아, 다 생각이 있어.”
3월 말에 심는 감자를 2월에 주문하다니 이상했지만,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하고 마음을 놓았다. 씨감자는 그대로 현관에서 2주를 보내며 예쁘게 싹을 틔웠다. 거실에 펼쳐놓고 싹이 난 곳을 살피며 감자를 쪼개던 그가 말했다.
“나 이제 씨감자 쪼개는 방법을 알겠어.”
유레카. 깨달음의 순간에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하지감자는 늦게 심으면 씨알이 작아 먹기가 불편했다. 이번에 그는 미리 싹을 내 조금 일찍 심어도 감자가 얼지 않도록 깊게 심어 커다란 감자를 수확할 생각인 것 같았다.
입춘이 지나 우수가 되면 그의 움직임이 부산해진다. 밭에 가니 인적 없던 곳에 생기가 돈다. 그는 창고를 열어 농기구를 정리하고 나는 씨앗을 한데 모아 손을 돕는다. 햇살이 따스했다. 농막 구석에 있던 기타를 꺼내 들고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불렀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때마침 봄바람이 살랑 불어온다.
남편은 4년차 초보 농사꾼이다. 도시에서 태어난 그는 퇴직하면 시골에서 살고 싶다며 3년 전부터 농사일을 시작했다. 4년이면 초보를 뗄 것 같지만 횟수로 3번 농사를 지어본 것이지 매번 심는 시기를 놓치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주말에만 다니며 100여 평의 농사를 짓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다 매년 새로운 작물을 시도하기 때문에 익숙해지는 데는 한참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농사 동영상을 찾아보기도 하고 필요한 농기구를 주문해 사용하기도 하며 점점 발전하는 중이다. 농사에 대한 그의 진심이 느껴진다.
나는 그를 돕는 4년차 보조다. 농사꾼이란 말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넓게 펼쳐진 하늘 위로 하얗게 피어나는 구름이 좋고 차가운 바람에도 푸른 잎을 피워내는 초록이 좋아 그를 따라 이곳에 온다. 그저 때가 되면 씨를 뿌리고 잡초가 무성하면 뽑아주고 열매가 맺으면 거두는 게 나의 역할이다. 미리 무엇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은 그에게 맡기고 그때그때 일을 돕다 챙겨간 새참을 나눠 먹으면 아주 행복하다. 필요한 대로 움직이는 것이 좋고 그마저도 힘이 들 때는 그냥 앉아서 쉰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잘 움직이고 그가 시키는 일도 잘한다. 이곳에서는 정말 마음이 편안하고 그와도 마음이 잘 맞아 참 평화롭다.
2월 농사는 밭을 가는 일부터 시작한다. 살살 녹은 땅을 삽으로 깊게 파서 뒤집는다. 농부들은 대부분 관리기나 트랙터를 이용하지만, 그는 다 몸으로 한다. 종일 흙을 뒤집고 그 위에 퇴비를 뿌렸다. 퇴비량을 정하고 구입하는 것도 초보 농사꾼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퇴비를 다량 구입하면 좋겠지만 일반가로 사기에는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퇴비가 적어도 수확이 잘 되는 고구마, 땅콩 같은 작물을 많이 심고 퇴비가 많아야 잘 자라는 작물은 한 곳에 몰아서 심기로 했다. 퇴비를 뿌리고 밭을 가는 남편의 모습이 푸른 하늘과 어우러져 싱그럽게 보였다.
퇴비를 섞은 흙은 일주일간 그대로 두었다가 다음 주말에 가서 고랑을 만들고 멀칭을 했다. 비닐멀칭은 잡초가 덜 자라게 하고 보온의 효과가 있으며 수분‧양분의 유실을 감소시켜 농사일을 쉽게 해주지만, 폐비닐의 발생으로 환경이 오염되는 문제가 있다. 일부 밭에 비닐 없이 작물을 키워 보니 여름철 찌는 더위에 작물들은 타들어가고 잡초는 무성해져 도로 멀칭을 하게 되었다. 그는 비닐이 말린 둥근 통에 고추지지대로 쓰는 긴 막대를 끼워 양 끝에 두꺼운 줄을 감아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만들어 쓴다. 고랑 끝에 비닐을 놓고 흙을 덮어 고정한 후 줄을 당겨 중간쯤 두고는 양옆을 흙으로 덮고 다시 줄을 고랑 끝까지 당겨 팽팽하게 한 후 마무리한다. 이렇게 하면 혼자서도 쓱쓱 그 넓은 밭을 가지런히 검은 밭이랑으로 채울 수 있다. 도구를 활용해 일을 그의 아이디어가 반짝인다.
그사이 나는 상추씨를 심어 볼까 어슬렁거렸다. 2월에 심어도 되는 작물이 생각보다 많아 마음이 설레었다. 그런 나를 보더니 쪽파를 심으라고 했다. 아무 데나 씨를 뿌려 일을 만들까 염려하던 그가 서둘러 시킨 일이었다. 작년 가을 심은 양파와 마늘 사이 싹이 나지 않은 곳을 지목했다. 미리 주문해둔 종근도 꺼냈다. 그는 진즉이 보조에게 일을 시킬 요량이었다. 쪽파 종근은 튼실했다. 갈라져 있는 것은 쪼개서 싹이 잘 나오도록 끝을 잘라 구멍에 하나씩 심었다. 사시사철 필요한 쪽파를 심고 나니 뿌듯했다.
시금치밭에도 씨를 뿌렸다. 납작하게 땅에 붙어 추위를 견딘 시금치 사이에 한 꼬집씩 씨앗을 눌러 심고 흙을 덮었다. 그 사이 그는 상추 고랑을 완성했다. 드디어 내가 상추씨를 들고 출동했다. 호미 자루 끝으로 5개씩 구멍을 내고 여러 종류의 상추씨를 구멍에 나누어 뿌렸다. 심는 데만 열중인 내게 그가 한마디 했다.
“심는 게 다가 아니야.”
내가 좀 더 농사일에 관심 갖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이 묻어있다. 농사일이 어디 신경 쓸 게 한두 가지일까. 일 년 농사를 짓는 일은 준비부터 거두는 것까지 챙겨야 할 일이 정말 많다. 퇴비를 하는 것부터 작물에 필요한 비료도 가끔 줘야 하고 솎아주고 가지치기를 해주는 것까지 모두 꼭 필요한 일들이다. 잘 자랄 수 있게 물 주는 것은 기본에다 둑을 높여줘야 하는 작물도 있고 꽃을 따줘야 하는 작물도 있다. 제각각 돌봐야 하는 방법과 시기가 다르다 보니 농사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심어만 놓고 수확을 얼마 하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남편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농사에 진심을 보인다. 그런 그에게 농사일은 다 맡기고 나는 그냥 기타를 튕기고 싶지만,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도 밭일을 할 때 빛나는 남편을 보면 내 속에도 그런 모습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이곳에서 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내며 다시 봄이 오는 섭리를 조금씩 깨쳐 간다. 추운 겨울이 있어야 따스한 봄이 오고 바람이 불어야 꽃이 피는 자연스러움을 배워가는 것 같다.
심는 게 다가 아닌 남편의 2월이 바쁘게 지나간다. 자연스럽게 나의 2월도 바쁘게 흐른다. 3월엔 또 어떤 봄이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