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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주 Nov 29. 2019

와우. 싱가폴, 쏘 뷰리폴.

남편에 의해 마지못해 끌려간 반전여행기

 

1.    광고


메일제목 : (광고) Tanjong beach club is waiting for you!!! 


오랜만에 들어간 개인메일함에서 파아란 굴림글씨체의 구불구불한 제목이 격하게 나를 반겼다. Waiting for you. 나란 존재를 기다리고 있다니, 그리고 무려 느낌표가 하나도 아니고 세개. 앞에 (광고)라는 말머리만 붙지않았다면 나는 발신자인 Tanjong beach club 사장과 사랑에 빠질 뻔했다. 그리고 불현듯 찾아온 그 메일만 가만히 응시하던 나는 지난 2월 남편과 함께 떠났던 싱가폴 센토사에 있는 그 Tanjong beach club을 떠올리고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싱가폴로 떠났던 2월, 그즈음 나는 심하게 앓았다. 지난해부터 슬슬 내 몸을 압박해오던 골반통이 본격적으로 나를 괴롭히면서 누워서는 자세를 바꾸지도, 뛰기는커녕 걷기도 버거운 지경에 이르러 내한몸 건사하지 못했다. 그리고 하필이면 지난해의 내가 왜 이모양 이꼴이 될지도 모르고 싱가폴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나, 하고 막심하게 후회했다. 취소할까, 그러기엔 이미 승인이 나버린 회사연차, 환불도 안되는 호텔 및 비행기 티켓의 가격들이 나의 머리 위에 둥둥 떠다녔다. 나는 앞으로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최소 몇 달의 미래는 내다볼 수 있는 타로카드를 공부해야 하지않을까, 라고 생각하다 이내 점쟁이가 장래희망이라는게 조금은 내키지않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그놈의 ‘싱가폴’을 가고싶어졌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몇 년 전, 베트남 여행이 너무 별로였던 탓에 내 인생에서 다시는 동남아여행은 없다고 결심해버렸던 나였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 해답은 너무 쉽게나왔다. 그건 바로 너, 남편 때문이었다. 


 






2.    이러다 말라죽을 것 같아 간 여행



와, 은주야. 이거 봐. 여기 진짜 싱가폴같다.


싱가폴이 아니라 용인 한가운데에서 남편은 신나게 운전이란 것을 하고 있었고, 앞유리 너머로 펼쳐진 풍경은 다름아닌 좋은 날씨에 그저 푸르른 나무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져 있다는 것, 단지 그것 뿐이었다. 대체 여기서 어디가, 무엇이, 어떻게 그 나라같은건지 그리고 그 때의 너는 왜 시도때도없이 그리고 밑도끝도없이 내가 가보지도 않은 싱가폴 이야기를 꺼내는건지 진정 궁금했다.



은주야, 싱가폴 사람들은 자기가 먹은 커피를 굳이 안치워도 돼. 

응, 이제 싱가폴 이야기는 그만.



그 시절, 스타벅스에서도 나는 그의 싱가폴 이야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옆테이블의 손님들이 자신이 먹은 빈 잔을 치우기위해 일어섰을 때, 그는 또 싱가폴 이야기를 꺼냈다. 정말 궁금하지않은 TMI였다. 



은주야, 싱가폴은 정말 너무 좋아. 나의 제 2의 고향이야. 그리고 그 곳에 beach가 있는데 너를 꼭 데려가고 싶어. 너도 그 곳에 가면 정말 좋아할거야. 

오빠, 그건 너무 일방적인 사랑 아닐까. 나에게도, 싱가폴에게도. 



누가보면 싱가폴에서 몇 년 살다온 사람인 줄 알겠다. 종로에만 20년 넘게 산 남편은 고작 회사출장으로 몇 번 머물지않았던 싱가폴을 왜 제2의 고향이라며 찬양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싱가폴에서 도를 아십니까,라도 만나 미친 것이 아닐까. 그 이후에도 남편은 나에게 몇 십번이나 새파란 싱가폴의 해변과 백사장을 찍은 핸드폰 동영상을 보여주었고, 싱가폴의 유구한 역사와 그들이 주로 쓰는 언어, 인종의 구성비율 등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말해주었다. 


결국 나는 가보지도 않은 싱가폴을 백번정도 여행한 사람처럼 그냥 그 나라가 지겨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아, 내가 이렇게 살 바에야 말라죽겠다, 이 사람과 싱가폴을 한번 가주어야지 다시는 이런 말을 안할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그 날, 싱가폴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3. 결말이 뻔하면 재미없잖아요.


여행의 첫 시작은 꽤나 불만스러웠다. 싱가폴이 발을 디딘 첫 날부터 나는 마치 할머니가 된 듯 그의 손을 잡고 느리게 걸었다. 횡단보도의 초록불 신호등이 켜있는 시간도 우리나라보다 몇 초는 짧은 것 같아 건널 때마다 조바심이 났지만 골반통때문에 빠른 걸음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에스컬레이터는 또 왜이렇게 빠른건지 그 올라타야하는 한걸음 내딛기가 그렇게 힘이들 수 없었다. 나는 무리를 해서 싱가폴에 온 것을 후회했지만, 내 짐을 모두 들고 있는 그에게 감정을 솔직히 드러낼 수는 없었다. 하는수없이 나는 그와 걷다가 쉬기를 반복하며 역시 여행은 젊을 때 가는게 맞는 것 같다는 이야기 따위를 나누었다.


그러나 여행에 오기 전 병원에서 지은 진통제 때문이었을까. 이튿날부터 거짓말처럼 통증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나보다. 운좋게 내가 잠깐 나아진 사이, 우리는 이 기회가 곧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한국에서 입에 침이마르도록 칭찬했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칵테일 바로 데려가 슬링을 입에다 물려주고 나의 반응을 살피었으며, 로컬카페에 데려가 정말 그곳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이 먹은 컵과 접시를 치우지 않는 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나는 다양한 언어를 섞어 쓰는 다양한 인종들 사이에서 걸으며 정말 오빠가 말한 인구비율이 맞긴 맞는구나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마침내 Tanjong beach.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내 배꼽언저리 어딘가부터 힘을주며 복식으로 소리를 질렀다. 



와우. 싱가폴. 쏘 뷰리폴.




미숫가루같은 고운입자의 모래가 널려있는 백사장, 에메랄드빛의 투명한 바다, 한가로이 수영하고 있는 아메리칸인지 유러피안인지 모를 백인들, 그리고 골반이 아프지않은 건강한 상태의 나 그리고 원래 정상인 너. 나는 그 날, Tanjong beach를 보고 한눈에 홀려버렸다. 몇 년전, 이 곳에서 스스로도 모르게 동영상으로 이 자연을 한번에 담으려고 했던 너처럼. 


그 곳에서 베드에 누워 책을 읽고 맥주를 마시는 그 평화로운 시간동안 나는 마치 천국에 온듯하였고, 왜 당신이 그토록 이 곳에 나를 데려오기를, 나도 좋아할거라는 확신을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무런 잡념도 아무런 몸의 고통도 나에게 찾아오지않았으며, 오직 너와 나만이 이곳을 만끽하고 있었으니까.



은주 너를 꼭 데려가고 싶어. 

너도 그 곳에 가면 정말 좋아할거야.



나는 문득 그가 나에게 한국에서 수없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Tanjong beach의 시원한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몇 년 전, 생애 처음으로 여권에 도장이란 것을 찍어본 당신.

이 낯설고 아름다운 곳을 보고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떠올려버린 당신.

돌아와서는 재잘재잘 싱가폴에 대해서 극찬하던 당신.

기어코 나를 그 곳으로 인도해버린 당신. 

지금, 여기 같은 곳을 바라보고있는 당신과 나. 


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나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용인의 어느 도로 한복판에서 ‘이곳 정말 싱가폴같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것 같았다. 아, 물론 스타벅스에서도. 



와우. 싱가폴, 쏘 뷰리폴.









<작가의 말>


[24시, 연중무휴 행운분식] 이야기를 매거진과 북으로 발간해서 쓰고 있는데, 다른 이야기도 좀 쓰면 어떨까 싶어서 저의 잡문을 다 모아놓은 새 매거진 [에세이맛집, 이대리네]를 발간하였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지] 팟캐스트에서 에피소드를 낭독하고 비하인드 스토리도 이야기하고 있어요. 함께해요. 

http://www.podbbang.com/ch/1774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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