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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주 Dec 02. 2019

나는 오늘도 너에게 사랑에 빠진다.



퇴근길 강남역 지하상가. 나는 송사리떼처럼 바삐 오고가는 사람들 틈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뭐에 홀린 사람마냥 마네킹이 입고있는 분홍색 린넨원피스를 찬찬히 훑고는 그 끝자락을 손으로 슬슬 만져보았다. 나의 질문에 안쪽 카운터에 있던 직원은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사장님, 이 원피스 라지사이즈 있어요? 

언니, 그거 프리사이즈.



직원이 준 원피스를 받아들고 간이 탈의실로 향한 나는 그 좁은 공간 안에서 실로 여러가지 감정을 느꼈다. 첫째, 분노. 프리사이즈지만 내 배는 전혀 프리하지않았다. 오히려 살 속으로 파고드는 고무줄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프리덤을 외치고 싶었을 뿐. 둘째, 헛헛함. 분명 마네킹이 입었을 때는 살짝 가슴골이 보였는데…, 뭐지 내 안의 이 공허함은…. 어디서 숭숭 바람이 부는 것 같기도 하고. 셋째, 서러움. 남들보다 큰 키를 가진 나에게 이것은 원피스가 아니라 엉덩이를 겨우 가릴만한 티셔츠정도의 길이랄까. 아, 이 망할놈의 유전자…. 오늘도 실패다. 나는 한숨을 쉬며 탈의실 커튼을 젖힌 뒤, 직원에게 말했다. 사장님, 나 뒤에 지퍼 좀 내려줘요. 이거 벗어야겠어요.



언니. 아니 잠깐만 나와봐요. 내가 봐줄게. 

언니…. 안짧아, 안짧아! 원래 이 옷은 이렇게 입는거야. 그나저나 색깔 언니랑 너무 찰떡이다.


뱃살? 

언니, 그건 보정속옷 입으면 되지. 잠깐만 언니~, 우리 가게에 기가 막힌 물건 하나 있잖아. 

언니 이거 안에입으면 똥뱃살 쏙 들어가. 내가 보장할게요. 나는 결혼식 갈 때마다 이거 꼭 입어. 완전 강추. 



가슴? 

언니, 잠깐만요. 내가 만져볼게. 내가 딱 알아. 잠깐만 언니…. 

요즘은 가슴 신경안써. 그게 트렌드야 언니. 

근데 정 언니가 신경쓰이면 여기다 패드 해요. 저 앞가게 보이죠. 나 저기서 대박 신세계 맛봤잖아. 언니가 괜찮다고 하면 내가 소개시켜줄게.



그 날, 219,000원을 썼다. 







단지 50,000원짜리 원피스가 맘에들었을 뿐인데, 나의 손에는 어느새 보정속옷 그리고 안에 받쳐입을 또다른 롱원피스, 전체적인 바디라인을 살짝 가려줄 가을쟈켓이 들려있었다. 거기에서 그치지않않다. 그 앞 속옷가게에 들러 대박신세계 뽕브라까지 구매했다. 물론 그것이 대박신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나의 총체적 콤플렉스를 가려줄 모든것들이 든 비닐봉투를 양발 사이에 두었다. 그대로 선채 핸드폰만 만지작 대니 승모근이 아프다고 아우성이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자연히 시선은 유리창 너머에 있는 나와 다른이들의 모습으로 향했다. 내 오른쪽에 있는 이는 평범한 키에 평범한 얼굴에 평범한 몸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칸에서 나는 몇번째로 큰 여자일까. 아마 첫번째 아니면 두번째겠지. 가끔 나와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은 내 머리 끝을 한번 보고는 시선을 아래로 냉큼 옮겨 하이힐을 신었는지 운동화를 신었는지 한번 더 확인하곤 하는데 그건 또 무슨 이유에서일까. 나는 평범한 걸까, 다른 사람들은 나를 자신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할까. 왜 원피스는 짧고 지랄일까. 키가 크면 허리라도 잘록할 것이지 배는 또 왜나왔지. 근데 가슴까지 도마같이 평평해. 정말 최악이다. 금세 커지는 솜사탕처럼 이런 생각들은 불어나기 시작했고, 지하철 내부는 곧 나와 내가 아닌 사람들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나는 푹 고개를 숙였다. 


내 발 사이, 조금이라도 평범해 보이기 위해 산 노력의 산물들이 보기싫게 구겨져있었다.








으으, 춥다. 왜 이렇게 늦게왔어.


지하철 입구 밖으로 털레털레 나오자, 다가온 남편이 춥지, 하며 자신의 주머니 안으로 내 손을 쑥 이끌어 넣었다. 우리는 어느새 다가온 가을밤을 마주하며 같이 걸었다. 저 앞에 초록의 신호가 깜박거렸다. 굳이 건너지않았다. 나는 횡단보도 근처에서 나보다 앞서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이 중에서 제일 큰 것 같아.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보다 작은게 말이 많네. 


그 날, 침대 위에서 어둠을 덮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슴수술 하고싶어.

은주야, 나 너 가슴때문에 만난거야.


그럼 지방흡입이라도 해주던가. 뱃살만. 진짜 임산부같아.

어이구, 몽실몽실하니 난 이거 만지는게 제일 좋아.


투턱도 싫어. 무턱수술할까.

미안한데, 그것만은 양보못해. 그게 제일 매력적이거든.


몰래할거야. 

그 순간 이혼이야.


점빼고싶어.

안돼. 난 너 점 세면서 잠드는게 루틴이야.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빠져나온다. 그러는동안 내가 느낀 헛헛함이 무언가로 꽉 채워진다. 

어느새 바깥세상에서 느낀 분노와 서러움이 휘발되어간다.

아무것도 보정하지않고 아무것도 바르지않은 날것의 우리가 서로를 바라본다.

모공가득한 너의 얼굴이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오늘도, 사랑에 빠진다. 





[공지] 팟캐스트에서 에피소드를 낭독하고 비하인드 스토리도 이야기하고 있어요. 3화에서는 이 이야기를 낭독했는데 참 삼천포로 빠지는 토크 많이했네요. 주접이에요, 정말. 

http://www.podbbang.com/ch/1774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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