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강남역 지하상가. 나는 송사리떼처럼 바삐 오고가는 사람들 틈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뭐에 홀린 사람마냥 마네킹이 입고있는 분홍색 린넨원피스를 찬찬히 훑고는 그 끝자락을 손으로 슬슬 만져보았다. 나의 질문에 안쪽 카운터에 있던 직원은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사장님, 이 원피스 라지사이즈 있어요?
언니, 그거 프리사이즈.
직원이 준 원피스를 받아들고 간이 탈의실로 향한 나는 그 좁은 공간 안에서 실로 여러가지 감정을 느꼈다. 첫째, 분노. 프리사이즈지만 내 배는 전혀 프리하지않았다. 오히려 살 속으로 파고드는 고무줄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프리덤을 외치고 싶었을 뿐. 둘째, 헛헛함. 분명 마네킹이 입었을 때는 살짝 가슴골이 보였는데…, 뭐지 내 안의 이 공허함은…. 어디서 숭숭 바람이 부는 것 같기도 하고. 셋째, 서러움. 남들보다 큰 키를 가진 나에게 이것은 원피스가 아니라 엉덩이를 겨우 가릴만한 티셔츠정도의 길이랄까. 아, 이 망할놈의 유전자…. 오늘도 실패다. 나는 한숨을 쉬며 탈의실 커튼을 젖힌 뒤, 직원에게 말했다. 사장님, 나 뒤에 지퍼 좀 내려줘요. 이거 벗어야겠어요.
언니. 아니 잠깐만 나와봐요. 내가 봐줄게.
언니…. 안짧아, 안짧아! 원래 이 옷은 이렇게 입는거야. 그나저나 색깔 언니랑 너무 찰떡이다.
뱃살?
언니, 그건 보정속옷 입으면 되지. 잠깐만 언니~, 우리 가게에 기가 막힌 물건 하나 있잖아.
언니 이거 안에입으면 똥뱃살 쏙 들어가. 내가 보장할게요. 나는 결혼식 갈 때마다 이거 꼭 입어. 완전 강추.
가슴?
언니, 잠깐만요. 내가 만져볼게. 내가 딱 알아. 잠깐만 언니….
요즘은 가슴 신경안써. 그게 트렌드야 언니.
근데 정 언니가 신경쓰이면 여기다 패드 해요. 저 앞가게 보이죠. 나 저기서 대박 신세계 맛봤잖아. 언니가 괜찮다고 하면 내가 소개시켜줄게.
그 날, 219,000원을 썼다.
단지 50,000원짜리 원피스가 맘에들었을 뿐인데, 나의 손에는 어느새 보정속옷 그리고 안에 받쳐입을 또다른 롱원피스, 전체적인 바디라인을 살짝 가려줄 가을쟈켓이 들려있었다. 거기에서 그치지않않다. 그 앞 속옷가게에 들러 대박신세계 뽕브라까지 구매했다. 물론 그것이 대박신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나의 총체적 콤플렉스를 가려줄 모든것들이 든 비닐봉투를 양발 사이에 두었다. 그대로 선채 핸드폰만 만지작 대니 승모근이 아프다고 아우성이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자연히 시선은 유리창 너머에 있는 나와 다른이들의 모습으로 향했다. 내 오른쪽에 있는 이는 평범한 키에 평범한 얼굴에 평범한 몸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칸에서 나는 몇번째로 큰 여자일까. 아마 첫번째 아니면 두번째겠지. 가끔 나와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은 내 머리 끝을 한번 보고는 시선을 아래로 냉큼 옮겨 하이힐을 신었는지 운동화를 신었는지 한번 더 확인하곤 하는데 그건 또 무슨 이유에서일까. 나는 평범한 걸까, 다른 사람들은 나를 자신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할까. 왜 원피스는 짧고 지랄일까. 키가 크면 허리라도 잘록할 것이지 배는 또 왜나왔지. 근데 가슴까지 도마같이 평평해. 정말 최악이다. 금세 커지는 솜사탕처럼 이런 생각들은 불어나기 시작했고, 지하철 내부는 곧 나와 내가 아닌 사람들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나는 푹 고개를 숙였다.
내 발 사이, 조금이라도 평범해 보이기 위해 산 노력의 산물들이 보기싫게 구겨져있었다.
으으, 춥다. 왜 이렇게 늦게왔어.
지하철 입구 밖으로 털레털레 나오자, 다가온 남편이 춥지, 하며 자신의 주머니 안으로 내 손을 쑥 이끌어 넣었다. 우리는 어느새 다가온 가을밤을 마주하며 같이 걸었다. 저 앞에 초록의 신호가 깜박거렸다. 굳이 건너지않았다. 나는 횡단보도 근처에서 나보다 앞서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이 중에서 제일 큰 것 같아.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보다 작은게 말이 많네.
그 날, 침대 위에서 어둠을 덮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슴수술 하고싶어.
은주야, 나 너 가슴때문에 만난거야.
그럼 지방흡입이라도 해주던가. 뱃살만. 진짜 임산부같아.
어이구, 몽실몽실하니 난 이거 만지는게 제일 좋아.
투턱도 싫어. 무턱수술할까.
미안한데, 그것만은 양보못해. 그게 제일 매력적이거든.
몰래할거야.
그 순간 이혼이야.
점빼고싶어.
안돼. 난 너 점 세면서 잠드는게 루틴이야.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빠져나온다. 그러는동안 내가 느낀 헛헛함이 무언가로 꽉 채워진다.
어느새 바깥세상에서 느낀 분노와 서러움이 휘발되어간다.
아무것도 보정하지않고 아무것도 바르지않은 날것의 우리가 서로를 바라본다.
모공가득한 너의 얼굴이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오늘도, 사랑에 빠진다.
[공지] 팟캐스트에서 에피소드를 낭독하고 비하인드 스토리도 이야기하고 있어요. 3화에서는 이 이야기를 낭독했는데 참 삼천포로 빠지는 토크 많이했네요. 주접이에요,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