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주 Sep 29. 2019

미미를 찾아서

뜨거운 햇살이 비추던 여름날, 나는 땀을 비질 흘리며 길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어휴, 6월밖에 안되었는데 왜 이렇게 더운 거야'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아침에 본 뉴스에서는 기자가 해변에서 무언가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나나였고 무려 포항에서 재배한 것이라고 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뜨겁게 데워지고 있었다.  


나는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에 섰다. 뒤에서는 나를 사랑으로 채워달라는 홍진영 씨의 노래가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랑이고 나발이고 지금 내 배터리는 방전 상태가 분명했는데 마침 손님이 그 가게에서 나오면서 시원한 매장의 한기가 내 쪽으로 돌연 흘러왔고, 순간 자연히 그곳에 시선이 돌아갔다. 


노래는 핸드폰 매장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별다를 건 없는 가게였다. 전국에 2만 명쯤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장님이 미쳤다'는 사실 같은 거짓부렁의 현수막을 내걸고 있었고, 보도블록 위에는 사은품으로 보이는 휴지와 라면이 줄을 지어 보였다. 그때, 나의 시선은 투명한 창 너머로 보이는 가게 한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일반 프라모델들이 층을 이루어 전시되어 있었다. 아마 파는 건 아닌 것 같고, 미친 사장님의 애장품으로 보였다. 


갑자기 ‘키덜트’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성인이 되어서도 장난감에 큰 관심을 가지는 어른들을 칭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속성을 가지는 데에는 세 가지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느 날 불현듯 관심이 생겼거나 아니면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좋아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너무 갖고 싶었지만 가질 수 없었던 사람들이 뒤늦게 욕구를 발현해서 수집 광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뭐 무엇이든 좋았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는지도 모르고 가게의 구석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사람들의 일률적인 움직임을 느끼고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다 문득 어렸을 적 가지고 놀았던 나의 유일한 장난감,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파마머리의 미미인형이 떠올랐다. 



자매가 셋이면 집 안에 장난감이 넘칠 것 같지만, 늦둥이 막내가 태어난 경우는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 된다. 이미 커버린 언니들은 장난감보다 구본승이나 DJDOC의 포스터를 더 소중히 여기곤 했고, 우리 집에 내가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구입 시기를 추정할 수 없는 팔 빠진 마론인형이나 작은 솜 인형들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의 나는 부모님에게 무엇을 사달라며 마트에 누워 떼를 쓰거나 조르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 무엇을 사달라고 해서 사주실 분들이 아니기도 했고, 내가 가장 많이 본 엄마의 모습은 깨어있을 때보다 피곤에 절어 잠든 모습이 더 많아서 쉽사리 뭘 해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대신에 나는 홀로 아파트 앞 상가에 있는 문구점으로 자주 향하곤 했다. 그곳에는 로봇과 마론인형들이 가득 전시되어 있었는데 괜히 상자에 있는 투명한 플라스틱을 꾹꾹 눌러보다가 가만히 쳐다보다가 하는 일이 잦았다. 그리고 아는 아이가 오면 괜히 우리 엄마가 이것도 사주고, 저것도 사주고, 여기부터 여기부터 다 사준다고 했어라고 허풍을 떨어대기도 했다.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알고 있었으면서.


하지만 그런 나에게 유일하게 선물을 안겨주는 분이 있었다. 바로 큰엄마였다. 우리 가족은 큰집으로 심심치 않게 놀러를 가곤 했는데, 큰엄마는 우리 세 자매 중에서 나를 제일 예뻐하셨다. 사실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키만 크고 깡말랐으며 그렇다고 예쁜 여자애도 아니었던 나를 큰엄마는 왜 이렇게 예뻐하셨던 걸까. 한번 물어볼걸 그랬나. 


나는 아직도 큰엄마와의 데이트가 생각난다. 다른 가족들 하나도 없이 큰엄마와 나는 손을 잡고 가게들이 즐비한 어떤 거리를 함께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내가 ‘큰엄마, 저게 예뻐요.’라고 말하면 점원이 옷과 가방을 들고 와서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고는 했고, 그러고 나면 얼마 후 내 품에는 귀여운 가방 하나가 달랑달랑 매여있었다. 이상했다. 엄마와 아버지에게는 무엇을 사달라고 말도 못 꺼냈으면서 큰엄마에게는 그게 되었다. 나에게 큰엄마는 큰엄마라고 한 번이라도 더 말하고 싶은 그리고 이상하게 손을 놓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큰엄마를 다시 보게 된 건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병원 안에서였다. 몸이 약하게 태어난 나는 열 살 즈음 어떤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큰엄마가 병문안을 온 것이었다. 단발의 파마머리에 쟈켓을 입은 큰엄마를 단번에 알아본 나는 큰엄마-,라고 목소리도 내보고 싶고, 손을 뻗어보고 싶기도 했는데 사실 수술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힘이 없던 탓에 그럴 수는 없었다. 대신, 큰엄마가 나의 손을 따뜻하게 만져주었는데 그 느낌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녀는 은주야, 괜찮니? 조금 있으면 금방 나을 거야.라는 말을 하고는 가지고 온 쇼핑백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서 나의 품에 안겨주었다. 흘긋 시선을 들어 무엇인지 보니 맙소사, 그건 파마 인형을 한 보라색 드레스의 미미인형이었다. 내가 말한 적도 없는, 그러나 너무나 갖고 싶었던 장난감. 


큰엄마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미미인형을 갖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큰엄마, 저게 예뻐요.’라고 하며 손가락을 뻗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그녀와 나 사이에는 특별한 교감 같은 게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가 돌아가고 나는 미미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머리도 감겨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옷도 빨아주었다. 물론, 그녀가 파마머리라서 곧 풀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뭉치곤 했지만 난 그것을 무지막지하게 아끼곤 했다. 


시간이 흘러 10대가 되고 20대가 되니 큰엄마를 만날 일은 점점 없어졌다. 고작 명절에 두 번 정도 볼 수 있는 게 다였고, 그마저도 스스로 머리가 컸다고 묻는 말에만 대답하며 데면데면하게 대할 뿐이었다. 그래도 큰엄마는 명절마다 '은주야, 많이 먹어. 응? 이것도 먹고.'라는 말을 빠짐없이 해주었고, 비록 내가 암묵적인 못난이로 통하던 탓에 친척들의 동의를 구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세 자매 중에 내가 제일 예쁘다는 말도 과감하게 해 주셨다. 


지난해, 큰엄마는 긴 여행을 떠나셨다. 뜨거운 곳으로 가시기 전에 나와 친척들은 큰엄마의 관 위로 손을 얹었다. 안내원은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다. 보라색 드레스의 파마 머리를 한 미미인형이 떠올랐다. 마음속으로 큰엄마, 이제 편히 쉬세요.라고 했다. 엄마는 우리 형님, 가시네라며 눈물을 흘렸고, 고모는 큰 소리로 해숙아, 잘 가라고 하였다. 영진이 언니는 엄마, 이제 안 아플 거예요.라고 말했다. 




사실은 엄마가 나에게 장난감을 사주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 마음속으로 ‘엄마 이 과자 말고요, 나 인형 갖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이미 행운 분식에서 힘들게 일하며 고생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 말을 하면 나는 나쁜 어린이가 되는 것 같았다. 


큰엄마는 이런 나의 목마름을 해갈해준 유일한 어른이었다. 엄마가 주지 못한 어떤 사랑의 한 조각을 들고 계시던 분. 그래서 어릴 적 나는 어떤 순간순간에, 엄마보다 그녀에게 더 따뜻함을 느낀 게 아닌가 싶다. 말 그대로 그녀는  커다란 엄마(큰엄마)와 같았다. 


혜숙씨, 큰엄마, 혜숙씨, 큰엄마. 

큰엄마.

큰엄마. 

고마웠어요. 편히 쉬세요. 






<작가의 말>

지난 가을, 큰엄마가 돌아가셨다. 

큰엄마를 화장하는 그 시간에 밖으로 나가 잠깐 찬바람을 맞고 있었는데 왠 단풍이 그렇게 빨갛고 노랗고 예쁘고 난리인지.

누가 돌아가시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날이기도 했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날 돌아가셔서 다행이기도 한 참 이상한 감정이 교차했던 그런 날이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