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로의 도망자들
도시에 발을 디디자마자 사랑에 빠져버리는 인간의 태반은 도망자다.
누구누구의 딸이 아니라, 어느 동네의 무슨 집 걔가 아니라, 구구절점 이어져오는 역사의 한 챕터가 아니라. 새하얀 배경에 똑떨어진 검정 잉크처럼 선명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행복. 그건 얽히고 섥힌 과거를 도마뱀 꼬리 자르듯 저멀리 두고온 이들에게만 허락된 행복이다.
선명한 잉크가 되어 “자, 이제 내 진짜 이야기를 써내려가볼까” 하는데, 막상 눈앞에 펼쳐진 백지가 너무 광활한 반면 내 안에 든 것은 없어 패닉이 오는 순간 조차 행복하다. 여기저기 부유하는 까만 점이 나혼자는 아닐테니까.
내가 겪은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기 위해 아이를 갖지 않아도, 나의 흔적을 좇다가 이름은 물론 인생마저 흔적밖에 남지 않아도, 도시는 각자의 사정을 품는다. 아니 그냥 개의치 않는다. 그럴 시간도, 관심도, 무엇보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도망자들에게 그러한 도시의 무관심은 땡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