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단 목소리
내 안에 목소리가 있다.
아주 주관이 세다.
내 삶이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주절주절 떠든다.
그 목소리는 가끔 얼굴을 달고 나타난다.
무서운 선생님의 얼굴,
실망 가득한 아빠의 얼굴,
젠체하는 동급생의 얼굴,
짝사랑하는 그이의 얼굴,
그 목소리가 날카로워질까봐 두렵다.
나는 목소리의 심기를 거르지 않으려 눈치를 본다.
카메라를 달고 사는 리얼리티 속 스타처럼
CCTV를 의식하는 갑의 을의 병의 정 정도되는 노동자처럼
하지만 아주 고요한 밤
모든 소리가 잦아들고
기껏 남은 소음은 벽지 속 반복되는 패턴처럼 느껴지는 그때에
나는 목소리가 가장 무서운 얼굴을 달고 나타난 걸 알아챈다.
아주 어린 날의, 가장 순수한 시절의,
하지만 왜인지 이번 생을 수차례 살아본듯한
나의 얼굴을 달고 나타난 목소리다.
있는 그대로의 나.
과거도 미래도 치우치지 않은 정확히 현재의 나.
나는 부끄러워진다.
그 목소리는 단 한순간도 내 삶을 쫓아오지 않은 적 없다.
있는 그대로의 욕망을 읊는다.
해온 그대로의 행동을 기록한다.
내가 나이지 못한 순간들에 목소리엔 의아함이 담긴다.
목소리는 외면 받을 때마다 조금씩 더 소리를 키워왔다.
고요한 밤, 나의 내면은 이제 목소리로 쩌렁쩌렁하다.
부끄러워서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
그래도 감사하다.
목소리가 거기에 있어서.
아직 내 귀에 들려서.
운명은 마법처럼 내 몸에 꼭맞는 날개옷 같은 게 아니다.
오히려 몸에 꽉 끼고 겉모습은 우스꽝스러워서
내 옷임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쪽에 더 가깝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사건들,
되는대로 되지 않는 주변까지도
나의 삶이고 운명임을 받아들이는 순간,
목소리는 내게 더이상 비난도 지시도 하지 않는다.
나를 위해 목소리를 내어주기 시작한다.
아주 우렁차게 대변해준다.
그 목소리와 나는 대화를 나누며 삶의 하모니를 이루어간다.
그렇게 삶의 든든한 아군을 얻은 채
나는 두려움 없이 영면에 들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잠든 내 귓가로 아주 현란한
이 세상에 전에 없던
두번 다시는 연주 될 수 없는
그런 재즈가 울려퍼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