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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Jan 03. 2024

미니멀리스트의 여행 기념품

-여행에서는 짐을 부치지 않는다(기안84)

 '과거의 나'는 여행지에서 이런저런 선물을 사 오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받는 것도 좋아해서, 누가 여행을 다녀왔다며 선물을 건네면 '어머, 거기서도 나를 생각했단 말이야?' 하며 무척 기뻤다. 그것이 현지의 과자 한 봉지나 실생활에 그다지 쓸모없는 것이라도 기쁨의 크기는 작지 않았다.

  

 나는 '미안함'과 '고마움' 문에 여행지에서 기념품을 샀다.

 동료는 일하는데 나는 놀러 다는 미안함, 잠시 곁을 떠나보니 새삼 변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고마움의 감정으로 선물을 산다.

 한 유명 소설가는 여행을 하는 나라에서 안경을 새로 맞추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나의 지인들은 여행하는 지역의 예쁜 마그넷을 수집하고, 나라 이름이 적힌 앞치마나 전통의상을 입은 스타벅스 곰인형을 모은다. 방문한 지역에서 크리스마스 용품을 찾아 사 오는 친구도 있다.

 그것은 아무리 돈과 시간이 있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만들 수 없는 '시간과 기억의 컬렉션'이다. 그래서 부러울 때도 있었다.

 

 나도 이제부터라도 아이템을 하나 정해서 모아볼까? 가볍고 예쁘고 부담 없는 엽서? 아니면 뭘 따로 살 필요 없이 현지에서 쓰는 교통카드를 보관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발급한 카드로 외국에서 지하철과 버스를 타는 시대가 돼 버렸다.

일본의 스타벅스 베어리스타들



 

 살림한 지 20년이 지나고 나서야 집에 물건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고 가능한 한 줄이면서 살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물건에 대한 태도가 차츰 달라졌다. 이게 꼭 필요한가, 이미 비슷한 것은 없나, 만약 이걸 산다면 얼마나 오래 쓸 수 있는지 따져본다. 여전히 앞뒤 안 가리고 덜컥 사고 보는 경우도 있지만 그 횟수는 많이 줄었다.  


 여행지에서의 쇼핑도 마찬가지다.

 올해 초 유럽 도시들에 갔을 때다. 예쁘고 이국적인 것들, 사고 싶은 것들을 사는 대신 휴대폰으로 찍었다. 이미 나에겐 구입 당시의 애정을 잃고 쓰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물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상점에서 발견한 보물을 돈을 내고 가져와 소유하면 어쩐지 그 빛이 사그라든다.

 이미지 파일들은 인화하지 않고 백업해 두었다. 여행지의 추억을 매일 들여다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때는 내가 처음으로 꽤 멀리 갔다 온 것이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 줄 소소하고 실용적인 영국풍 아이템을 사 왔었다. 만 원에 세 개짜리였지만 다들 좋아해서 보람이 있긴 했다.  

 

 내 인생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친구와 둘이서 다녀온 이번 여행에서는 최소의 물건만 샀다.

 수하물을 부치지 말고 갖고 탈 수 있는 만큼만 짐을 만들자는 다짐을 지키려고 국내 판매가에 비해 반값인 술 한 병을 고민 끝에 사지 않았다.

 그래도 21인치 트렁크 가득 가족들을 위한 물건과 먹을거리를 채웠다.

 내가 맘 편히 놀러 다니도록 여행비용부터 집안일까지 지원해 주는 남편, 그리고 나에게 늘 행복을 주는 딸들에게 줄 것들이었다. 항상 손수건을 휴대하는 남편을 위해 예쁜 손수건 몇 장을 샀다. 큰딸이 좋아하는 현지 과자류를 넉넉히 담고 작은딸이 요즘 들어 부쩍 귀엽다고 난리인 캐릭터 굿즈들을 정성껏 골랐다.

 엄마의 여행에 용돈까지 협찬해 준 큰딸은 회사 팀원들과 과자를 나눠 먹었다고 사진을 보내줬다.

 

이런 여행 기념품은 미니멀리스트에게도 적절한 소비였다고 생각한다.

딸들에게 주려고 이고지고 온 것들, 큰딸은 팀원들과 나눠먹었다고 한다



 출국장 면세점에서 내가 쓸 지갑도 샀다. 일상에서 지폐를 쓰지 않게 되면서 클래식한 지갑들은 내 수중에서 도태되었다. 실용성을 이유로 지퍼 달린 동전 지갑에 필요한 것들만 넣고 다닌다. 가격도 적당하고 보기에도 허접하지 않은 지갑을 하나 사고 싶었다. 비건레더 원단과 꼼꼼한 박음질 마감에 좋은 지퍼가 달렸고 카드 두어 장과 운전면허증, 카페 쿠폰들, 동전이 다 들어가서 좋다.


 잃어버리지 않고 낡을 때까지 쓴다면 한 일흔 살까지도 쓸 것 같다.

내가 쓰려고 산 데일리 지갑


 친구들이 여행은 잘 다녀왔냐고 묻는다. 그곳 이야기를 좀 해 보라거나, 사진을 보여달라는 친구도 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사 왔는데 떠벌이기가 머쓱했다. 남들에게 손주 사진을 보여주고 싶으면 커피를 먼저 사라고 하던가? 아무것도 안 내놓으면서 여행 갔다 온 얘기를 하기가 쑥스럽다.

 

 그렇다, 나눠주는 여행 기념품의 기능에는 '놀러 갔다 온 이야기 당당하게 하기'도 있었다.

 



 

 '미니멀리스트'가 무엇인지 찾아보면 정의가 조금씩 다른데 얼마 전에 마음에 드는 설명을 찾았다. 영어회화 어플에서였다.   

 나는 '필요 없는 것을 줄이려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풀이에는 현재진행형과 미래지향형의 의미가 같이 있고 주어의 의지도 표현되어서 마음에 쏙 든다.

  

 '나는 미니멀리스트잖아'라고 하거나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다'라고 하면 친구들은 코웃음을 친다. 

 나 스스로도, 지금 저 싱크대 칸마다 그릇이 가득하고 베란다 창고에는 빈 구석이 없으면서 웬 미니멀리스트 운운이냐는 반성도 된다. 

 그러나 소파도 티브이도 없고 식기는 나무 그릇과 숟가락포크 하나뿐인 사람만 미니멀리스트가 아니라 '필요 없는 것을 줄이려는 사람'을 미니멀리스트라고 격려해 준다면, 나는 미니멀리스트가 맞다.

 

 누가 봐도 '그래, 인생 안팎이 미니멀하구나'라고 인정받는 만렙이 100이라면 지금은 한 23정도라 자평한다. 올해 목표는 레벨 75쯤?


 새해에도 레벨 업을 위해 노력하겠다.

  

미니멀리스트의 바람직한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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