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로 기억하는 어느 나라)의 깊은 골짜기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버린 옷으로 만들어진 강이 있다고 한다. 지구 각처에서 버려져 거기까지 흘러간 형형색색의 옷이 이룬 강말이다.
진짜 그런 곳이 있는지 찾아보진 않았지만 예전에도 옷 쓰레기가 만든 거대한 언덕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옷의 언덕이 있다면 옷의 강도 있을 것이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 살면 매 계절 옷장정리를 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옷을 버리게 된다. 오랫동안 입었거나 잦은 세탁으로 해지고 변형되어 버리기도 하지만 더 이상 입지 않아 버리는 옷들이 더 많다. 보통 1년 내내 입지 않은 옷은 앞으로도 입지 않는다는 말이 맞다. 고민 없이 덥썩 산 옷이나 평소와 다른 스타일에 도전해 보려고 호기롭게 산 옷들을 결국 안 입는다.
중고거래라는 옵션도 있지만 나는 올리고 합의하는 과정이 번거로워서, 좋은 옷은 지인에게 주고 나머지는 버리는 편이다.
어김없는 반복되는 버리기 행동이 불편하게 느껴지던 무렵에 마침 옷의 강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팩트 체크를 하기가 두려웠다. 내 머리에 상상이 완료돼 떠오른 '헌옷의 강'은 이름과 달리 흐르지 못하고 끝없이 누덕누덕 쌓여서 옴짝달싹 할 수 없는 행렬을 이루고 있다.
저 먼 곳에 실존하며 나날이 불어난다는 옷의 강 모습을 직면하고 싶지 않다.
그 강둑에서 희끄무레하고 삐쩍 마른 산양인지 염소인지가 우물거리며 씹고 있는 것이 내가 입던 티셔츠일 것 같아서,라고 말할 수는 없다.
너무 많은 옷들-다른 집 자료 사진(우리 집 아님 강조)
헌옷수거함이 우리 집 반경 100미터 안에 몇 개나 있을까. 아파트 동마다 있는 것들을 빼고도 주택가 이면도로 언저리나 뜻밖의 길목에서도 초록색 철제함을 볼 수 있다.
계절이 바뀔 무렵이면 우리 아파트의 헌옷수거함 앞에는 그 안에 다 못 들어간 옷들이 쌓여 있기도 하다. 헌옷은 일정 기준량 이상을 내놓고 수거업자에게 개별 연락을 하면 킬로당 현금을 정산해 주고 가져가기도 한다. 비대면 전문세탁업체에서는 헌옷을 수거한 후 자기네 포인트로 적립해서 세탁서비스 이용에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헌옷은 어쨌든 여전히 '돈이 된다'는 건데, 버려진 옷의 강은 어쩐 일로 날로 늘어나는 것일까.
하긴 세상에는 옷이 많아도 너무 많다. 새옷으로서 매대에서 설레며 소비자를 기다려도 결국 닿지도 못하고 옷의 강으로 사라지는 양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옷가게들과 백화점, 아웃렛을 항상 가득 채우는 물량은 기본이고 온라인에도 개인몰부터 대기업 수준의 패션전문 브랜드까지 이런 전장이 따로 없다. 가끔 세상 편한 자세로 누워옷구경을 하다가 내가 먼저 지친다.
바로 우리 주변의 길거리에는 사장님이 미쳐서 노마진 원가이하판매 하는 옷들도 많고, 유명 스포츠 브랜드와 아웃도어 브랜드들은 툭하면 창고세일과 80%, 90% 정리세일을 한다. 비어 있는 상가에는 십중팔구 의류세일 행사 매장이 초단기 계약을 하고 간판 대신 현수막을 달고 성업을 한다.
집 밖뿐 아니라 집 안에 있는 내 옷장 안에도 옷이 참 많다. 옷을 안 사는 계절이 없는데 입을 옷이 맨날 없는 것은 인류의 난제다.
그리고 입을 옷은 없는데 버릴 옷이 많은 것도 미스터리다.
이번 정리에서 버린 뭉치
집 앞 버스 정거장 앞에 5층짜리 신축상가가 올라갔고 하나둘 분양을 해서 새 가게들이 들어오고 있다. 부동산 경기가 좋을 때가 아닌 데다 (내 생각에) 분양가도 높은 편이라 아직도 주인이 찾지 못하고 텅 빈 공간이 있다.
그중 모서리 상가에 단기 의류 할인 매장이 입점했는데 흔한 스포츠웨어가 아닌 여성의류라 시선이 갔다. 계절을 딱 겨냥한 겨울 상품들이 ㄱ자의 유리벽을 가득 메우고 진열됐다. 오가다 보면 구경 중인 손님들이 늘 있었다.
시기가 딱 좋다. 김장이라는 큼직한 계절행사와 자녀들과 버텨내야 할 겨울방학이 오고, 크리스마스와 연말이라는 분위기 그리고 좀 멀리 설날 연휴까지를 생각하면 머리가 딱딱 아픈 주부들로선 '집에서 입는 옷이라도 좀 예쁜 거 입고 위안을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품는 때다.
각종 니트는 만원부터, 기모바지와 뽀글이 양털 조끼, 코트류와 패딩까지 겨울 아이템을 완비하고 있는 듯했다.
빈 점포에 먼저 들어오는 의류할인 행사장
나의 일상적인 동선 안에 있는 위치라 적어도 하루 두 번 이상을 지나다녔는데 일부러 들어가지 않았다. 구경은 할 수 있잖아?라는 내면의 유혹도 접었다.
대신 집에서 조신하게 겨울 옷 정리를 했다. 보풀 제거를 살짝 하고 의류관리기에 케어만 하면 당장 그 매장에 걸어놓아도 팔릴 만한 옷들인데도 더 이상 입지 않는 옷들이 몇 개나 나왔다.
옷장에 옷이 많아도 나는 몇 벌의 옷만 늘 돌아가며 입는다. 그것들은 내가 좋아하고, 입으면 심신이 편하고, 입었을 때 제법 나에게 어울리는 옷들이다.
이제 만원, 이만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끌려서 꼭 필요하지 않은 옷을 사지 않겠다! 누가 그랬지, 우리는 필요해서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그저 물건을 보기 때문에 사는 거라고.
예전의 나라면 한 번쯤 들러서 돌아보고 한두 개 집어왔을 옷가게를 무심하게 지나치는 나의 내적 성장을 셀프 칭찬하는데 그 집 바로 옆에 또 다른 의류할인행사장이 들어왔다.
이번엔 무려 '명품의류 원가판매'다. 대체 어떤 명품을 얼마에 판다는 것인가라는 원초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적이 등장했다. 애초에 명품이라고 할 만한 상품을 판매하는 방식은 아니겠고 그냥 심심한데 구경이나 할까 하다가 정신줄을 움켜 잡았다.
인간은 보기 때문에 물건을 산다. 아예 들어가지도 말고 보지도 말자.
그게 옷이든 뭐든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고민 없이 사지 말고, 용도와 기능을 감안하여 신중하게 고른 뒤에 제값을 주고 사서 즐겁게 오래 소비하자. 나로부터 생기는 쓰레기를 조금씩이라도 줄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