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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Jan 06. 2024

어머니, 저 다 들었어요

26년차 며느리의 맷집

 시댁에 도착해서 인사만 드리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26년차 며느리는 시댁 화장실도 편하다)

 토요일 오전에 아버지는 운동을 가시고 시어머니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일정하게 반복되는 화장실 벽타일 무늬에 집중하고 있는데 모자의 목소리가 들다. 원래 어머니의 목소리는 힘이 넘치는데 막내아들이 와서 텐션업 상태라 음량이 더 커진 듯하다. (그리고 내가 눈은 어둡지만 귀는 밝다)  


 -너 이 홍삼 다 가져가.

 -엄마아부지 드시지 우릴 줘요.

 -우린 맨날 홍삼물을 달여서 먹잖어. 홍삼이 필요 없어. 정관장이야, 너 갖다 먹어.

 -음.... 홍삼은 또 이명선이가 좋아하지.


 어머니 앞에서 눈치 없소릴 하는 남편 목소리에, '주책이' 하면서도 기분이 좋은데,


-니가 먹어야지! 추운데 출근하는 사람이. 아침마다 하나씩 꼭 먹고 가. 알았어?


 하... 어머니, 기왕이면 말씀만으로도 둘이 같이 먹으라고 해 주시지. 아무리 제가 홍삼 좋아한다고 혼자서 다 먹겠냐고요.

 거실로 나오면서 어머니께 말했다.


 -어머니, 아침마다 아들 꼭 챙겨줄 테니 걱정 마세요. 저는 어차피 근종 있어서 홍삼 못 먹어요.

 -그래, 근종 있는 사람은 고영양식품 먹으면 안 좋아. 근종이 다 받아먹고 큰다자나!


 이쯤에서 우리 어머니스타일을 모르는 남들은 '어머, 너무하시다. 근종 있으면 영양실조 걸리란 거야 뭐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26년간 어머니의 화법 체득한 며느리다. 어머니는  순간에 생각나는  앞뒤 가릴 새 없이 화다닥 하시,  그런 척 꽁하게 담아뒀다 폭로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나도 누구한테든 말솜씨에선 지지 않고, 무엇보다 '어머니의 본심''발화되는 언어'의 격차를 알기 때문에 전혀 대미지가 없다.

 

 참고로 내 뱃속에서 소중히(?) 자라고 있는 자궁근종에는 홍삼이 나쁘다는 설과 크게 보면 건강에 좋다는 주장이 상충한다. 나의 산부인과 선생님은 '그먹는다고 얼마나 차이가 나요. 먹고 싶은 거 다 잘 먹으면 돼요' 주의다.

 정관장 홍삼을 잔뜩 얻어온 후 정말로 남편만 줬냐고?

 물론 아니다. 나야말로 어머니 앞에서 호언한 말과 행동이 다르다. 남편 홍삼 챙겨주기는 새로운 루틴이라 종종 까먹라도  몫은 매일 하나씩 잊지 않고 쪽쪽 빨아먹는다.   

안 먹는단 건 거짓말, 다 내 거




 며느리 세월이 쌓여서 방어력이 진화한 것은 아니다.

 20여 년 전 일이다. 큰딸의 백일잔치가 끝나고 집에 들르신 시어머니는 내가 아기에게 일회용 기저귀를 채우는 것을 보셨다. 어머니는 바로 지적하며 '일회용 기저귀는 합성 제품이라 애기 궁뎅이 다 짓무른다, 천기저귀를 써야 된다' 고 걱정다.

 나는 '기저귀 발진은 일회용이냐 천이냐의 문제가 아니고 일회용도 자주 갈아주면 괜찮다'고 말씀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에도 십여 장씩 나올 기저귀를 빨고 말리고 접고 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 니가 시간이 없니? 애기 잘 때 하면 되지.

 - 아우, 애기 잘 땐 저도 자야죠.

 - 아이고, 아파트 뜨신 물 콸콸 나오겠다 뭐가 힘드냐. 나는 옛날에 엄동설한 찬물에도 새빨개져서 뻣뻣한 손으로 다 빨아 널었어. 하얀 기저귀를 널어놓으면 끝에 고드름이 주렁주렁했다.

 -...... 그럼 기저귀 빨래는 아범 시켜도 돼요?

 - 아범 시키면 안 되지! 걔도 힘든데!

 - 저도 힘들어서 못 해요. 그냥 일회용 기저귀 잘 갈아 줄게요.

 - 아이고, 요즘 것들은.......


  결혼 초부터 쭉 우리의 대화는 이런 식이다.

 어머니와 의견이 상충할 때 나는 내 입장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내 스타일대로 대응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이고, 못살아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하시  이상 뭐라고 하지 않으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며느리가 고분고분하지 않으니 썩 맘에 들지는 않으실 거다.

 (순응하는 캐릭터로 고정되면 필요한 순간에도 반항하기가 어렵다. 내가 딸로서 부모에게도 그런 법인데 하물며 며느리로서는!)


 올해 내가 결혼하기 전의 세월과 이 집 막내며느리가 된 세월의 길이가 똑같아진다.

 그 생각에 미치 뭉클하여 지은 지 40년도 넘었다는 집을 둘러보았다.

 주방 한편 수납장에 어머니 글씨로 '해충 셑트'라고 이름표를 붙인 바구니가 있다. 해충 세트라니 웃음이 났지만 안에 어떤 물건이 들었는지 정확히 알겠고 강한 느낌표로써 취급에 주의하라는 의미를 강력히 전달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정성껏 첨부한 '쩜쩜쩜'은 뭔지 모르지만 귀엽다.

어머니가 써서 붙인 라벨




 사람의 말로써 받은 마음의 상처는 몸에 난 상처보다 깊게 오래간다지만 사람마다 똑같은 말에도 상처를 받고 안 받고의 차이가 다. 같은 말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맷집에 따라 후유증이 다르다.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듣는 사람의 해석이 달라 오해가 생기는 일흔하. 그 순간 상대가 나의 진의를 물어주면 좋으련만, 자기 혼자 판단하고 오랫동안 야속해하기도 한다.

 친구건 남편이건 자식이건 부모, 상대의 말이나 행동로 인해 괴로울 때는 속에 쌓두며 데쓰노트를 적지 말고 밖으로 풀어내.

 나는 원래 말이 많고 빠르고 누구에게든(그게 시어머니라 해도) 지금 안 하면 답답할 것 같은 참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한국 중년 여성의 고질병이라는 화병이 아직 없나 보다.

  

 벌써 26년 동안 시어머니와 나는, 하고 싶은 말은 하고, 듣기 좋은 대로 들으면서 적당히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이대로 잘 지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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